미국의 흑인들에 고유한 부분을 흉내내기 이상으로 잘 할 수 없다고 느낀 유럽의 연주자들이 자신들의 음악 전통인 클래식, 포크 혹은 민속 음악 등을 바탕으로 새로운 재즈를 만들어 그 영역을 확장시켰듯이 보컬에 있어서도 유럽의 재즈 보컬들은 미국의 보컬과 다른 개성을 지녔다. 그들은 스윙하고 깊은 울림으로 끈끈한 소울을 표현하기 보다는 리듬을 안으로 감추고 가사에 담긴 시적인 의미를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스위스 태생-가계(家系)로는 스위스와 독일-의 여성 보컬 수잔 아부헬은 노마 윈스턴, 시젤 엔드레센 등의 선배 보컬의 뒤를 이어 현재 이러한 유럽식 재즈 보컬의 모범이라 할만한 인물이다. 그녀는 시를 낭송하듯 나지막이 노래한다. 그리고 잔잔한 멜로디를 통해 시적인 서정을 표현한다. 그 가운데 이번 ECM에서의 세 번째 앨범은 지난 두 앨범에서 보여주었던 음악을 연장하면서도 보다 달콤하면서도 짙어진 시정으로 사이렌의 노래만큼이나 감상자를 아름다움으로 매혹시킨다.
이번 앨범에서 그녀는 자신이 직접 쓴 가사 외에 에밀리 디킨슨, 에밀리 브론테, 사라 티스데일 등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영미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가사로 사용했다. 특히 사랑, 죽음, 이별, 영혼 등을 주제로 시를 썼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총 16곡 가운데 10곡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에밀리 브론테와 사라 티스데일의 시가 각 두 편이 사용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남성 시인 왈라스 스티븐스의 시가 한 편 사용되었다. 그런데 수잔 아부헬은 이들 시인의 시들을 하나의 주제를 상정하고 고른 것 같다. 그 주제는 바로 떠나지 못함 혹은 은거(隱居)다. 하지만 수잔 아부헬은 이 주제를 무조건 우울하고 답답하게 노래하지 않는다. 분명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갈망이 주는 멜랑콜리가 전체를 지배하지만 그 다른 편으로는 고요한 실내에서 무한을 상상하는 낭만이 전체 사운드를 비감(悲感)에 빠지지 않게 한다. “If Bees Are Few”에 나오는 ‘초원을 만들고 싶다면 벌 한 마리와 클로버 하나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몽상이 혼자 다 알아서 할 것이다’라는 가사처럼 고독을 달콤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멜로디가 큰 힘을 발휘했다. 커다란 상승과 하강을 보이지는 않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시의 깊이를 만들 듯 몇 개의 음들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정서적 깊이가 대단하다.
약 9년 만에 새 앨범을 선보이면서 그녀는 편성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첫 앨범부터 함께 해 온 볼페르트 브레데로데를 중심에 두고 마티유 미셀(트럼펫)과 올라비 루히부오리(드럼)이 새로이 합류했다. 그 가운데 마티유 미셀의 트럼펫은 이전 두 앨범에서 들을 수 있었던 크리스토프 메이의 클라리넷과는 다른 질감으로 사운드에 신선함을 불어 넣는다. 나아가 멜로디를 강조하는 그의 연주는 수잔 아부헬의 노래와 적절한 대위적 관계를 형성하며 앨범의 낭만성을 강화한다. ‘Wild Night’에서 공간을 은은히 파고드는 연주, ‘Fall, Leaves, Fall ‘에서 수잔 아부헬이 잔잔하게 펼쳐놓은 어둠을 확장/고조시키는 연주가 좋은 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잔 아부헬의 음악적 핵심은 볼페르트 브레데로데의 피아노(혹은 하모니엄)에 있다. 그의 피아노는 단순한 반주, 분위기 연출의 역할을 벗어나 그녀의 노래가 가사의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보이지 않는 의미가 있음을 밝히고 그 심연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My River Runs To You’에서의 보컬 사이로 흐르는 연주가 특히나 그러하다.
물론 영어권 밖에 위치한 우리는 수잔 아부헬의 노래에 담긴 시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보컬의 훌륭함을 넘어 전체 사운드까지 좋은 앨범을 권하곤 한다. 언급한 대로 이 앨범 또한 전체 사운드가 매우 아름답다. 그 자체로 시적이고 서정적이다. 보컬을 하나의 악기처럼 받아들이고 듣는다고 해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앨범만큼은 시인들의 시를 먼저 읽어보고 감상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보다 더 농밀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