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예술작품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듯 주어진 천재적 영감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이 천재론은 오늘에 이르러 부단한 노력과 자기 반성, 성찰 등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관점으로 대체되었지만 그래도 어떤 작품 앞에서는 정말 천재가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재즈 피아노를 생각한다면 버드 파웰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는 텔로니어스 몽크와 함께 재즈 피아노의 역사를 비밥으로 이끈 주요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실제 이전에 비해 혁신적이다 싶을 만큼 과감한 코드 전개와 기예에 가까운 속주, 그러면서도 논리 정연한 솔로 등은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그래서 더욱 따르고 싶은 것이었다. 정말 그는 재즈 피아노를 발전시킨 것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이끈 개척자였다. 그러므로 그를 재즈 피아노의 메시아처럼 생각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닌 것이다.
실제 그가 1940년대 후반 특이하게도 버브와 블루 노트 레이블에서 동시에 리더 활동을 시작했을 때 이 두 레이블은 첫 앨범 타이틀로 각각 ‘천재적인 Genius’와 ‘경이로운 Amazing’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두 레이블의 표현은 당시 버드 파웰의 연주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블루 노트에서 발매된 앨범 <The Amazing Bud Powell vol. 1>은 한창 절정에 올랐던 버드 파웰의 모습을 확인하게 해주는 재즈사의 명반으로 꼽힌다.
버드 파웰이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칭호를 얻게 된 데에는 영화의 소재-1987년 프랑스의 베르트랑 타베르니가 감독한 영화 <Round Midnight>는 버드 파웰과 색소폰 연주자 레스터 영의 삶을 토대로 하고 있다-가 되었을 정도로 극적이었던 그의 삶 때문이기도 하다. 1945년 그는 트럼펫 연주자 쿠티 윌리엄스의 오케스트라 멤버로 순회공연을 하던 중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면서 경찰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다. 그래서 뇌에 손상을 입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평생 정신 분열과 두통에 시달리게 되고 나아가 알코올과 마약 중독에 빠지게 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치료를 위해 1947년 11월 뉴욕에 위치한 크리드무어 정신의학 센터에 입원했다. 이 곳에서 일년 이상 머무르며 치료를 받았는데 이 당시 받았던 전기 충격 요법은 그에게 부분 기억 상실을 일으키는 등 오히려 병세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앨범은 그렇게 치료는커녕 쇠약해진 몸으로 퇴원한 후에 녹음되었다.
이 앨범은 1949년 8월 8일 팻츠 나바로(트럼펫), 소니 롤린스(테너 색소폰), 토미 포터(베이스), 로이 헤인즈(드럼) 등과 함께 한 퀸텟 연주와 1951년 5월 1일 컬리 러셀(베이스), 막스 로치(드럼) 등과 함께 한 트리오 연주를 담고 있다. 그 가운데 퀸텟 연주는 편성이 편성인 만큼 버드 파웰의 피아노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퀸텟 연주를 이끄는 그의 능력과 다른 쟁쟁한 연주자의 솔로 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52nd Street Theme’은 3분을 채 넘지 못하는 곡이지만 팻츠 나바로와 소니 롤린스의 현란한 솔로가 빛을 발하는 곡이다. 물론 버드 파웰 또한 특유의 타악기와도 같은 왼손 컴핑과 전력 질주하는 오른손 솔로를 들려준다. 그 밖에 ‘Bouncing With Bud’나 ‘Wail’등의 퀸텟 연주에서도 절정에 오른, 나아가 하드 밥 시대로 이행할 준비를 하고 있던 비밥의 풍경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버드 파웰에 의해 피아노가 밴드 연주에서 다른 관악기 연주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표출할 수 있었음을 상기시켜준다.
버드 파웰의 화려한 모습은 확실히 트리오 연주에서 빛이 난다. 그는 베이스와 드럼의 견고한 지원을 받으며 현란한 솔로를 이어 나간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단연코 버드 파웰 개인을 대표하는 곡이자 블루 노트 레이블과 재즈 역사를 빛낸 곡으로 평가 받는 ‘Un Poco Loco’이다. 이 곡은 세 차례에 걸쳐 녹음되었는데 마지막 녹음이 마스터 테이크로 결정되기까지 드럼 솔로를 배치하는 등 조금씩 연주 시간을 늘려가며 녹음 현장에서 연주의 흐름, 구성을 즉흥적으로 다듬어 나갔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곡은 디지 길레스피가 ‘A Night In Tunisia’을 통해 개척했던 아프로 쿠반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라틴 리듬을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 길레스피의 아프로 쿠반 재즈라 하기 보다는 색다른 리듬이지만 정통적인 비밥의 틀 안을 넘지 않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한편 ‘Over The Rainbow’, ‘it Could Happen To You’ 같은 곡에서 그는 솔로 연주를 펼친다. 이 연주에서는 아트 테이텀을 위시한 그보다 앞선 시대를 풍미했던 피아노 선구자들의 영향을 드러낸다. 이것은 그가 흔히 생각하듯 과거를 부정했던 것이 아니라 선배들의 업적을 존중하고 그 위에 자신만의 피아니즘을 개척했던 연주자였음을 깨닫게 해준다.
어쩌면 지금의 시점에서 버드 파웰의 연주를 들으면 그다지 새롭다거나 획기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지금의 연주자들이 그보다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그 모든 것이 버드 파웰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했다시피 버드 파웰은 평생에 걸쳐서 정신분열, 두통 등으로 고생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정신 병원에 입원하거나 아니면 고통을 잊기 위해 손댄 마약으로 인해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1951년도 마찬가지였다. 1951년 5월 1일 이 앨범의 나머지 절반 부분을 녹음하고 <The Amazing Bud Powell vol. 2>에 실릴 연주를 녹음 한 후에 그는 마약 소지죄로 수감생활을 하다가 정신 발작을 일으켜 1953년 초반까지 정신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러다가 버드랜드 클럽의 주인이었던 오스카 굿스타인의 보호관찰 아래 병원에서 나와 연주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953년 5월 13일 매시 홀에서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찰스 밍거스, 막스 로치 등과 함께 전설적인 공연을 녹음할 수 있었고 이어 1951년 5월 1일에 녹음한 것 가운데 이번 앨범에 실리지 못한 녹음과 1953년 8월 14일의 녹음을 모아 <The Amazing Bud Powell vol. 2>을 발매할 수 있었다. 그 뒤 병원과 감옥을 오가는 그의 삶은 <The Amazing Bud Powell> 시리즈의 마지막 앨범인 <Scenes Change>를 마무리하고 1959년 파리로 건너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었다. 보통 버드 파웰이 음악적 총기로 빛났던, 정말 천재다웠던 때는 1954년까지였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경이로운 버드 파웰의 모습은 바로 이 앨범에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한다.
버드 파웰은 1959년 파리로 건너가기 전까지 블루 노트 레이블에서 총 다섯 장의 앨범을 녹음했다. 이들 앨범은 <The Amazing Bud Powell>의 시리즈를 구성하고 있는데 실제 앨범들 모두 그 음악적으로 매우 훌륭하다. 그러므로 다섯 장의 앨범 모두를 감상하는 것도 괜찮은 일인데 그렇다면 4장의 CD로 구성된 박스 세트 <The Complete Blue Note and Roost Recordings>를 선택하길 권한다. 아니면 모자이크 레이블에서 발매된 <The Complete Bud Powell Blue Note Recordings (1949-1958)>을 선택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만약 문제의 첫 번째 앨범만 들어보고 싶다면 RVG 에디션으로 발매된 가장 최신 버전을 권한다. 사실 이 앨범은 10인치 LP, 12인치 LP, 그리고 처음 CD로 발매될 때마다 수록곡에 약간의 변화를 보였다. 그러다가 가장 최근 발매된 RVG 에디션에 이르러 많은 얼터너티브 테이크를 포함한 모든 연주가 시간 순으로 수록될 수 있었다.
마약에 빠져 재능을 허비한 천재란 수식어를 너무 처음부터 접했던지라 사실 그를 제대로 만나기까지 개인적으론 많은 시간이 흘렀었습니다. 늦게 시작한 엘피수집 덕분에 이 음반은 초반으로 구할 수 있어서 처음 바늘을 올리던 설레는 순간이 너무 소중하게 남을 수 있는 행운을 얻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한사람을 평가하는 단편적인 수식이 무책임하게 퍼져서 쓸데없는 편견을 갖게 된 원인에 그 평가를 비판없이 수용한 저같은 감상자의 책임도 무시할 수는 없을것 같아요.
이 음반을 듣자마자 그가 마약을 했든 게으른 천재였든.. 그런 이미지는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오직 치열하게 음악속으로 파고드는 에너지만이 느껴졌습니다. 음악은 고통없는 아늑한 행복을 위한 도구도 아니고 그냥 음악이 가야만 하는, 음악 자신을 드러내는 길.. 순수하고 뚜렷한 그의 시선을 따라 저도 같이 그곳을 응시하게 만드는 힘.
이후 열심히 구했던 Bud! 음반을 들으면서 60여년전의 그와, 또 현재 그것을 찾아 듣고있는 나와.. 스타일과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 막 나타난, 늘 처음인 세계를.. 똑같이 만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버드 파웰은 그렇게 조금 늦었지만 더 강렬하게 저에게 다가온 재즈맨인것 같아요.
다시금 이 음반에 관한 자상한 이야기를 들으니 저절로 옷깃이 여미어 지네요. 천재란 단지 현란한 기술만을 과시한 이가 아님을..
음악을 하는 순간은 외부의 어떤 요인도 파고들 여지가 없을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정말 천재라서…
전 음악에 있어서 천재는 뭔가를 새로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그것을 잘 따라가는 자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환희의 길이 눈 앞에 턱하니 나타나거나 발견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시간과 상관 없이 그 길이 진리처럼 환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지…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ㅎ
새로운 길이라고 하시니 그 길이 눈앞에 떠오르네요. 그 길은 웬지 대도시의 번잡한 대로가 아니라 낯설고 신비한 풍경을 향한 가느다란 소로일것 같습니다. 재즈맨들이 점점 대중들과 멀어지며 음악의 더 내밀한 곳으로 이끌리게 된 것도 어쩌면 운명같은 것이었을까요. 외부의 자극에 얼룩진 개개인의 사연들이 결국 음악안에서 다녹아 그 발걸음마다 흔적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그런 길.. 별다른 생각없이 음악을 들으며 그 흔적을 뒤따라가다 문득 마주치는 눈빛같은 순간도 다 인연일까 궁금해지네요..
그렇죠. 갈수록 재즈가 세분화되고 있으니 대로에서 벗어난 찾기 힘든 소로를 걷는 것이 요즈음 연주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ㅎ 그래도 길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겠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ㅎ 올 해 큰 길이 보이기를 바랍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