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 연주자 게리 피콕하면 많은 사람들은 키스 자렛 트리오를 생각하게 된다. 워낙 이 트리오의 존재감이 독보적인데다가 그 안에서 게리 피콕의 연주 또한 훌륭하기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는 키스 자렛 이전에 빌 에반스, 폴 블레이 등의 피아노 연주자와 활동하는 한편 비밥부터 프리 재즈에 이르기까지 재즈사를 따라 다양한 음악을 연주해왔다. 이것은 최근까지 이어져왔다. 당장 ECM 레이블만 살펴도 폴 블레이, 마릴린 크리스펠, 랄프 타우너, 얀 가바렉, 토마추 스탄코 등과의 활동을 발견할 수 있다. 피아노 연주자 마크 코플란드와도 그는 듀오 혹은 트리오 편성으로 오랜 시간 함께 활동해왔다. ECM에서는 이 앨범이 처음이지만 Sketch, Pirouet 레이블 등에서 여러 장의 앨범을 찾을 수 있다.
그에 걸맞게 피아노 연주자와 베이스 연주자의 어울림은 매우 농밀하다. 서로의 연주에 집중하는 것만 같다가도 어느 순간 손을 잡고 같이 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악보나 스타일 차원이 아닌 정서적 차원에서 두 연주자가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이 배런의 드럼 연주 또한 아름답다. 사실 나는 그의 음악이 리듬을 안으로 감추고 여백이 많은 음악에 어울릴 수 있을 지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데 이런 우려와 상관 없이 두 연주자에 직관적으로 반응하며 사운드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그 결과 트리오의 연주는 ‘Gaia’, ‘Christa’ 등 멜로디가 상대적으로 명확한 곡보다 ‘Shadow’, ‘And Now’, ‘Moor’ 등 연주자들의 자유로운 순간적 감흥이 겹치고 펼쳐지는 곡에서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들 곡에서 트리오는 하나의 캔버스에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 그 그림은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생성하는 듯 추상적인 것이다.
한편 앨범에서 트리오가 연주한 곡에는 ‘Requiem’, ‘Gaia’, ‘Vignette’ 등 게리 피콕이 다른 ECM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했던 곡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Vignette’는 키스 자렛 트리오의 멤버가 공식 활동하기 전인1977년에 게리 피콕을 중심으로 모여 녹음한 <Tales of Another>에서 연주되었던 곡이기에 절로 키스 자렛 트리오와 비교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의미 없다. 어디까지나 게리 피콕의 트리오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크 코플랜드의 피아노는 크게는 키스 자렛과 궤를 같이 하는 부분이 있지만 정서나 표현의 방식에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트리오 연주에 있어 키스 자렛이 소설가라면 그는 화가에 더 가깝다. (이 차리 때문에 게리 피콕이 이 피아노 연주자와 오랜 시간 함께 한 것이 아닐까?) 여기에는 아무래도 스탠더드 곡이 아닌 창작곡을 연주한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앨범은 게리 피콕이 리더나 사이드 맨으로 ECM에서 녹음한 40번째 앨범이다. 그리고 그의 80세를 기념하는 앨범이기도 하다. 키스 자렛은 앞으로 더 이상의 트리오 활동은 없으리라 말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베이스 연주자의 건강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게리 피콕의 연주는 여전히 건강하고 창의적이다. 그래서 이번 트리오의 뛰어난 결과물과 상관 없이 저절로 키스 자렛 트리오를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