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월 뉴욕의 파워 스테이션 스튜디오에 키스 자렛을 중심으로 게리 피콕, 잭 드조넷 이렇게 세 연주자가 모였다. 그리고 스탠더드 곡을 거침 없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연주는 전통적인 피아노 트리오 형식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피아노 트리오 연주가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한을 새로이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서 후에 많은 피아노 연주자들과 그들이 이끄는 트리오들이 이 세 연주자들의 밀도 높은 인터플레이를 트리오 연주를 모범으로 삼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1983년 1월은 과거 빌 에반스가 스콧 라파로와 폴 모시앙을 대동하고 1959년 12월 뉴욕의 리브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앨범 녹음을 할 때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키스 자렛 트리오는 17장의 트리오 앨범을 선보였다. 그 앨범들 대부분은 스탠더드 곡들에 대한 트리오의 기막힌 해석을 담고 있는데 그 많은 수량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었다.
이런 키스 자렛 트리오가 어느덧 결성된 지 25주년을 맞았다. 그래서 ECM은 이 25주년을 기념하게 위해 두 장의 앨범을 준비했다. 하나는 <Setting Standards: New York Sessions> 이라는 타이틀로 1983년 1월의 녹음을 담고 있는 석 장의 앨범, <Standards vol. 1>, <Standards vol. 2>, <Changes>를 리마스터링하여 하나의 세트로 새로이 재구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트리오의 새로운 앨범 <My Foolish Heart>를 발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앨범을 구성하고 있는 음원이 지난 2001년에 녹음된 것이라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그러니까 트리오의 이전 앨범인 <Out-Of-Towner>(ECM 2004)보다는 1주일 전에 그리고 2002년 주앙 르 팽 재즈 페스티벌 실황을 담았던 <Up For It>(ECM 2003)보다는 1년 전에 녹음된 음원인 것이다. 보통 트리오의 25주년을 기념한다면 새로이 특별한 녹음을 할 법도 한데 제작자 맨프레드 아이허와 트리오는 이 2001년의 음원으로 25주년을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키스 자렛은 앨범 라이너 노트를 통해 흔들리는 리듬감부터 멜로디, 그리고 역동적인 힘에 이르는 모든 것들이 트리오가 이전에 가졌던 어떤 공연보다 이 2001년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공연에서 질적으로 더 높고 완벽한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곧바로 앨범으로 발표하지 않고 보다 더 적절한 발표시기를 기다려왔다고 한다. 실제 앨범의 내용은 이러한 키스 자렛의 언급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사실 키스 자렛을 중심으로 한 세 연주자가 펼치는 선연(鮮然)한 솔로와 촘촘한 인터플레이는 오래 전부터 궁극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었던 만큼 이번 앨범에서도 익숙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범은 매우 신선하다. 그것은 우선 연주된 곡들의 면모에서 느껴진다. 사실 키스 자렛 트리오는 그동안 스탠더드 트리오라 불릴 만큼 스탠더드 곡들을 중심으로 연주해왔다. 그런데 <Whisper Not>(ECM 2000) 이후 기존 유명 작곡가들의 곡들 외에 동료나 선배 연주자들이 작곡한 곡들을 종종 레퍼토리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 앨범에서는 전체 연주 곡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앨범을 보면 이미 잘 알려진 “My Foolish Heart”, “What’s New”등의 기존 스탠더드 곡들과 함께 마일스 데이비스의 “Four”, 소니 롤린스의 “Oleo”, 텔로니어스 몽크의 “Straight No Chaser” 그리고 게리 멀리건의 “Five Brothers” 등의 연주자들이 작곡한 곡들이 발견된다. 그래서 앨범은 여느 때보다 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앨범의 신선함은 선곡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키스 자렛의 연주에도 있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빌 에반스 이후 가장 창조적이고 현대적인 프레이징을 구사한다고 평가 받는 그가 랙타임과 스트라이드 스타일의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다는 것이다. “Ain’t Misbehavin’”을 시작으로 “Honeysuckle Rose”와 “You Took Advantage Of Me”로 이어지는 연주를 들어보라. 어떤 곡이건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나가던 키스 자렛이 스트라이드 피아노의 거장 팻츠 왈러의 그림자를 그대로 드러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순하고 강박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이 고전적 형식의 연주가 의외로 낡고 지루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 세 곡이 이어 연주되는 20여분의 시간이 앨범 전체에서 가장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을 연출한다.
이 밖에 소니 롤린스 작곡의 “Oleo”는 트리오가 지닌 매력을 새삼 확인하고 감동하게 한다. 이미 정해진 구조를 안정적으로 따르는 연주지만 테마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세 연주자는 100미터 육상경주를 하듯이 앞다투어 숨가쁜 전진을 계속한다. 화려하게 수많은 음들을 쏟아내면서도 과장, 과잉의 느낌을 주는 대신 최선의 선택이라 믿게 만드는 키스 자렛의 설득력 있는 피아노, 팽팽하게 신경을 잡아 당기는 듯한 잭 드조넷의 긴박한 드럼, 그 빠른 흐름의 기본 틀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게리 피콕의 명징(明澄)한 베이스를 듣다 보면 마치 세 연주자 모두 솔로 연주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솔로 같은 속주들이 기막히게 모여 조화로운 합주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트리오가 누리고 있는 폭넓은 대중적 인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인 아름다운 발라드 곡들도 변함없이 앨범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 앨범 타이틀 곡인 “My Foolish Heart”에서 키스 자렛은 원곡의 멜로디를 명확히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상상적 서정을 가미하여 감상자에게 막연한 동경(憧憬)을 유발한다.
지금까지 키스 자렛이 발표한 대부분의 앨범들은 열렬한 평단과 대중의 지지를 받아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Still Live>(ECM 1986)이나 <Tribute>(ECM 1989)을 넘어서는 연주는 없다고 생각해왔다. 트리오의 지난 앨범 <The-Out-Of-Towners>(ECM 2004) 정도가 가장 근접한 연주를 들려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 앨범은 트리오가 80년대에 녹음한 명반 이후 가장 뛰어난 연주를 들려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뛰어난 연주가 이번으로 끝나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