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닉 뵈르쉬는 매우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 10여 년간 이어지고 있는 Modul 시리즈의 곡들이 그것인데 여기서 ‘Modul’은 코드를 넘어선 하나의 음악적 동기를 의미하는 것 같다. 짧은 음악적 동기들이 반복되거나 겹쳐지면서 그 안에 리듬과 동양의 선(禪)적이기도 한 명상적인 여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최근의 Modul 곡들을 담고 있는 이번 앨범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두 세 마디의 짧은 동기들이 피아노에 의해 반복되고 색소폰이나 클라리넷에 의해 확장되면서 몽환적이기까지 한 공간성이 드러난다. 어찌보면 현대 음악의 미니멀리즘을 연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장 단순한 형태로 제어된 음악이지만 그 안에서도 자유로운 즉흥 연주가 보장된다는 것이 미니멀리즘 음악과 다른 점으로 드러난다. 마치 코드에서 해방되었던 모달 재즈가 풍부한 서사적 상상력을 지닌 솔로를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이 앨범 또한 반복을 통해 흥미로운 멜로디와 솔로를 생산해 낸다. 특히 여러 동기들이 반복되고 이어지며 그 위로 솔로 연주가 솟아오르는 ‘Modul 52’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반복 자체가 리듬과 곡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명상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내는‘Modul 47’도 인상적이다. 시간의 흐름을 붙잡으려는 시도랄까? 닉 뵈르쉬의 음악은 분명 강한 개성만큼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조와 즉흥 연주의 긴장을 새로운 차원에서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주목할 만 하다.
Llyria – Nik Bärtsch’s Ronin (ECM 2010)
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