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에반스가 이후의 재즈 피아노 연주자에게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남긴 영향은 매우 크다. 빌 에반스 시대의 연주자들이 아트 테이텀, 버드 파웰이나 레니 트리스타노 같은 연주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면 키스 자렛이 당대의 피아니즘에 혁명은 아니지만 하나의 준거로서 영향을 미치기 전까지는 빌 에반스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영향은 지속되고 있다. 사실 빌 에반스가 펼쳤던 피아니즘이 당대의 피아노 연주자들이 넘기 어려운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빌 에반스 스스로가 피아노를 가르칠 때 테크닉이나 음악 이론에 대한 것보다는 연주자의 자세등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피아노 연주자들이 따라야 할 것은 단순히 보이싱 방법이 아니라 빌 에반스의 탐구 자세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조금은 긴 서론으로 소개하는 스테판 올리바의 접근이 성공적이지 않나 생각된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테판 올리바는 현재 프랑스 재즈 피아노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로 BMG France에서 1998년 영화음악을 세 명의 솔로 피아노 연주자에게 독자적인 방식으로 해석해 연주하는 3장의 세트 앨범 <Jazz’n (E)Motion>을 제작했던 적이 있는데 그 3명의 피아노 연주자가 바로 프랑스 재즈 피아노의 거장 마르시알 솔랄과 스티브 쿤 그리고 스테판 올리바였다.
이 앨범은 비교적 올리바의 초기 앨범에 해당한다.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앨범 타이틀이 유명한 빌 에반스의 베이스 연주자 스콧 라파로의 ‘Jade Visions’이고 그 외 빌 에반스의 곡과 그가 즐겨 연주하던 곡들이 멜로디의 형식으로 올리바 자신의 곡과 섞여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빌 에반스의 영향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고 이 앨범이 단지 아! 그리운 빌 에반스!를 탄식처럼 내뱉게 하는 연주를 담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올리바를 중심으로 한 세 명의 연주자들의-스테판 올리바 트리오라기 보다는 세 명이 모두 공동 리더로서 힘을 분할하고 있다.- 인터 플레이와 스테판 올리바의 피아노 터치같은 데서 분명 빌 에반스를 느끼게 하는 면이 있지만 각 연주에는 스테판 올리바의 색이 더 드러난다. 그것은 빌 에반스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들의 영향을 드러냈던 반면 스테판 올리바는 인상주의 이후 현대 음악의 영향이 드러난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빌 에반스의 방법론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은 자신의 이야기로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피아니스트가 대단하다는 점은 터치등의 연주적인 차원 외에 아주 민감하다고 할 정도로 섬세한 편곡과 그 과정에서 이용하는 공간과 침묵에서 느껴진다. 예를 들면 자신의 곡 ‘Day’와 함께 메들리로 연주하는 ‘Someday My Prince Will Come’의 경우에 과감하게 멜로디를 축소하고 그 여백을 침묵으로 메우고 있다. 그래서 연주되는 노트들은 자신의 소리를 넘어서 멜로디의 지표로서 생략된 부분들까지 표현해내는 다중적인 소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앨범의 기조로 작용하며 거의 전 곡에서 반복된다. 그리고 편곡의 절묘함은 대부분의 곡들이 메들리로 연주되고 있다는 점에서 느낄 수 있다. 갑작스런 전환의 느낌보다는 악기의 변화를 통해서 구분을 임의적으로 나타낼 뿐 마치 하나의 곡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한편 또다른 축인 브뤼노 쉐비용의 베이스의 경우 올리바의 왼손이 고도의 텐션 코드로 중요부분만을 단속적으로 찍어 나갈 때는 피아노의 오른손같은 솔로를 펼쳐 나가고 올리바가 오른손 솔로를 펼칠 때는 피아노의 왼손과도 같은 솔로로 올리바를 지원한다. 이런 과정에서 연주자간의 인터 플레이가 유기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침묵을 고려한 편곡 또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된다. 드럼을 맏은 프랑소와 메르빌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연주를 할 때면 리듬이 아닌 소리의 차원에서 공간감이 강한 연주를 해 나간다.
현대음악을 반영하고 과감한 생략과 침묵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이 앨범에 담겨있는 연주들이 매우 난해하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마치 정물화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이 이 앨범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묘한 맛으로 들을수록 감상자를 신비한 기운으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 앨범은 빌 에반스를 받아들여 그대로 표출하지 않고 자신의 속에서 육화하는 과정이 드러나는, 요컨데 빌 에반스적인 동시에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앨범이라 말하고 싶다. 이후 스테판 올리바와 브뤼노 쉐비용은 지난 해 폴 모시앙을 불러서 <Fantasm>(BMG France)이라는 또 다른 빌 에반스적 앨범을 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