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면 보통은 혼자 눈물을 흘리고 지난 날을 추억하는 시간을 갖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한 깨달음을 얻는다면 모를까?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실제 많은 사람들은 이별의 아픔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1962년의 빌 에반스가 그랬다. 그는 1961년 7월 6일 베이스 연주자 스콧 라파로를 잃었다. 명작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와 <Waltz For Debby>(이상 1961)로 남겨진 뉴욕 빌리지 뱅가드 클럽 공연이 평단과 대중의 호응을 떠나 빌 에반스 본인에게도 크나큰 만족을 주었기에, 그래서 더 좋은 트리오 연주를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기에 베이스 연주자의 사망은 그에게 깊은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그는 연주를 멈추고 실의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기까지는 재즈를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빌 에반스 트리오와 스콧 라파로의 관계를 너무나 전설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인지 은둔의 기간을 실제보다 길게 긴 1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오해는 새로운 베이스 연주자 척 이스라엘과 함께 한 앨범 <Polka Dots And Moonbeams>이 1962년에 녹음되었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빌 에반스의 공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사실 오랜 시간 연주를 멈출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인기 피아노 연주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약물 중독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돈을 위해 슬픔을 뒤로 하고 마크 머피, 데이브 파이크, 태드 데머론, 베니 골든 등의 앨범에 사이드맨으로 참여하는 한편 자신의 이름을 건 솔로 활동을 계속해야 했다. 돈을 위해 연주를 했다고 해서 그가 뚜렷한 열정 없이 연주했다고는 생각하지 말자.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의 연주는 전혀 바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트리오의 와해를 기회로 삼은 듯 다양한 편성의 연주를 시도했다. 플루트 연주자 허비 맨과 쿼텟을 이루어 녹음한 앨범 <Nirvana>(1961), 기타 연주자 짐 홀과의 듀오 앨범 <Undercurrents>(1962) 그리고 퀸텟 앨범 <Interplay>이 그 예이다.
특히 앨범 <Interplay>의 녹음은 의외였다. 왜냐하면 이 앨범을 녹음하기 전에 두 번째 정규 트리오의 녹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2년 4월부터 6월까지 빌 에반스는 두 번째 트리오를 이끌고 두 장의 앨범 <Polka Dots And Moonbeams>, <How My Heart Sings>에 수록되는 곡들을 녹음했다. 이것은 척 이스라엘, 폴 모시앙이 함께 한 두 번째 트리오의 호흡이 탄탄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트리오를 중심으로 활동의 중심을 가져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빌 에반스는 퀸텟 편성의 앨범을 기획했다. 그것도 리듬 섹션에 트리오 멤버가 아니라 베이스 연주자 퍼시 히스, 드럼 연주자 필리 조 존스를 기용해서. 그만큼 빌 에반스는 퀸텟 편성의 연주에 대한 확실한 밑그림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퍼시 히스, 필리 조 존스 외에 그는 기타 연주자 짐 홀과 트럼펫 연주자 프레디 허바드-애초에 빌 에반스는 아트 파머를 원했었다 한다-를 기용했다. 당시 퀸텟이 트리오와 두 대의 관악기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과 달리 기타를 선택한 것은 온전히 빌 에반스의 생각이었다. 아마도 같은 해 5월 짐 홀과 듀오 앨범 <Undercurrents>을 녹음하면서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은데 결과적으로 색소폰 대신 기타를 기용한 것은 퀸텟의 매력을 배가시켰다. 그 매력은 다름아닌 실내악적인 분위기였다. 프레디 허바드와 짐 홀의 호흡은 트럼펫과 색소폰이 경쟁하듯 뜨겁게 질주하는 하드 밥이 아니라 한결 차분하고 여백이 느껴지는 쿨 재즈의 모습을 띠게 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1959년부터 당시까지 지속되고 있었던 색소폰 연주자 폴 데스몬드와 짐 홀의 호흡과 그 쿨한 분위기를 옮겨 왔다 싶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트럼펫과 대위적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으로 짐 홀의 기타는 빌 에반스의 피아노와는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Undercurrents>에서 들려주었던 서정을 다시 한 번 들려준다. 그래서일까? 빌 에반스는 당시의 어두운 개인적 상황과 상관 없이 싱그러운 활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때로는 직접 트럼펫과 호흡을 맞추며 관악기적인 솔로 연주를 펼친다. 그래서 색소폰 대신 기타를 기용한 빌 에반스의 선택이 정말 탁월한 것이었음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여기에는 연주자와 악기가 효과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한 에반스의 편곡이 큰 역할을 했음을 언급해야겠다.
한편 이 앨범을 녹음하고 한 달 뒤 빌 에반스는 프레디 허바드와 퍼시 히스 대신 색소폰 연주자 주트 심스와 베이스 연주자 론 카터가 가세한 새로운 퀸텟 앨범 <Loose Blues>를 녹음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합본되어 <Interplay Sessions>란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따라서 이 앨범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1962년 여름 이후 빌 에반스는 퀸텟 앨범을 더 이상 녹음하지 않았다. 대신 1963년 2월,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시도한 오버 더빙을 사용한 솔로 앨범 <Conversation With My Self>를 녹음하며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