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한 재즈계에서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연주한 사람은 유리 케인까지 3명이다. 제일 먼저 키스 자렛이 처음이었고 올 봄에 발표한 자끄 루시에가 두 번째였다. 이 세장의 앨범을 놓고 본다면 키스 자렛은 재즈 뮤지션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리지만 그가 연주했던 골드베르그 변주곡은 진지한 클래식으로의 접근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자끄 루시에의 앨범은 그가 수십 년 동안 바흐의 음악의 재즈 연주를 해왔음에도 왠지 어색한 느낌을 주었다. 바흐의 진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잇는 피아노 연주 아래로 어설프게 베이스와 드럼이 흐르는, 재즈와 클래식이 제대로 융합이 안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렇다면 이번 유리 케인의 앨범은 어떤가?
이번 골드베르그 앨범은 그가 클래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편곡하는 작업의 4번 째 앨범이 된다. 말러에서 시작해서 바그너와 슈만을 거쳐 바흐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 앨범은 같은 라벨에서 발표했던 다른 두 장의 앨범을 합쳐서 그가 지금까지 시도했던 음악들의 좀합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편곡을 보면 재즈라는 양식이나 클래식의 오리지날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곡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연주자들에 의해서 연주되고 있으면서 각 곡들간에는 숨돌릴 사이 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산출한다. 내가 보기에 그가 클래식 곡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할 때, 우선적으로 그 대상이 되는 클래식 곡을 다 해체하는 작업부터 하는 것같다. 그리고 각각의 조각들을 다시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에 맞추어 조립을 하는 것이다. 이 앨범도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이전의 말러, 바그너, 슈만의 음반에서는 기존의 곡을 자기 식으로 조립하는 것에 그쳤는데 이 앨범에는 자신의 창작곡을 그가 조립한 클래식 곡과 섞어 배치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변주곡들이 표현하는 양식도 다양하다. 일렉트로닉 연주부터 비발디 풍의 바로크 스트링으로의 편곡, 기존의 정통 재즈 포메이션을 위한 편곡, 아카펠라를 위한 편곡등 다양한 양식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담은 백남준식 비디오 설치 예술을 보고(듣고)있다는 것이 이 앨범을 들었을 때의 첫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재즈적인 요소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일까? 물론 재즈식 연주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유리 케인이 달고 있는 재즈 연주자라는 칭호에 의존해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재즈적인 즉흥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이 앨범이 주는 결과로서의 소리에 있는 것이 아닌 듯싶다. 일반적으로 재즈 음반이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것은 재즈의 양식을 갖춘 곡들이기도 했지만 연주자들이 무대에서건 스튜디오에서건 그들끼리 즐기며 연주하는 그 시간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이 앨범은 즐기며 연주하는 모습을 담는 것에 초점이 맟추어 있지 않다. 재즈가 주는 즉흥성과 새로움은 유리 케인이 골드베르그 변주곡과 작곡자 바흐가 주는 기존의 중압감을 버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리고 붙이는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앨범에는 그 과정을 담을 수는 없다. 단지 그가 오리고 붙여낸 결과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유리 케인은 이 앨범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각종 건반 악기 솜씨나 지휘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연주는 하나의 리더가 있다기 보다는 유리 케인의 편곡을 각 연주자가 나름대로 연주하는 형식을 보인다.
바흐의 음악을 보통 바로크 음악으로 분류하지만 그의 음악에는 시간을 뛰어넘는 것이 있었다. 무시간성이라고 할까? 그리고 그의 음악에는 인간적인 감정보다 범 우주적인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 케인의 음악을 듣다보면 이런 것들이 모두 파괴되고 변주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하프시코드와 피아노의 중간음을 내는 듯한 피아노의 아리아는 상당히 인간적인 면을 들려준다. 그리고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은 다양한 음악 문화-탱고, 쿠반, 보사노바, 테크노, 가스펠, 왈츠, 재즈-와 다양한 음악 사조-헨델, 비발디, 푸치니, 라흐마니노프, 모차르트, 현대 음악, 테크노, 재즈, 그리고 이들간의 상호교차-, 그리고 현대 기술적 방법-‘The “I POEM” variation’에서 사용된 목소리의 복사, 위치 배정을 통한 푸가의 시도-을 통해서 인간적인 시공간으로 변한다. 한편 이런 시공간성을 보이면서도 각 곡들의 휴지 없는 유기적 연결은 음반이라는 가상공간에 새로운 통 시공간성을 낳는다. 이것이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공존하는 현대성이 아닐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리 케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조립하는 그 근본에는 그가 단순히 하프시코드나 피아노 연주로 들었던 원곡으로부터 그 속에 은밀히 담겨 있는 소리들을 끄집어 내려는 의도가 있다. 대위법이 감추고 있던 저 속에 작은 소리로 남아 있는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또다른 소리들을 위로 끌어 올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악기를 위한 연주가 여러 개의 악기를 위한 연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바흐의 권리는 테마에 국한된다. 왜냐하면 유리 케인이 감춰진 소리를 끌어 올림으로서 바흐가 멜로디 아래에 구축했던 절대적인 화성의 건축은 상대적인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바흐가 수학적 계산에 의한 절대적 음악을 만들려 했다면 유리 케인은 그 수학적 엄격함 속에서 우연성을 찾는다. 이 우연성이 재즈적 즉흥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유리 케인의 이런 행위는 바흐라는 기존의 권위에 대해 기존 체제의 양식으로 교묘히 도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고 범 세계적인 바흐의 음악을 다양한 음악적 문화로 조각 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양한 표현의 능란함은 혹시 유리 케인이 일종의 조롱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알 수 없다.)
이 앨범이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제대로 반영했는가는 논외의 문제다. 이미 이 앨범에서 바흐의 아우라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흐가 하나의 테마를 주어진 법칙하에 다양하게 변곡하는 창조성을 보여주었다면 유리 케인의 이 앨범 또한 그 바흐의 그늘을 과감하게 벗어나려고 했다는 데서 어느 정도 바하의 창조 정신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