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허비 행콕의 새 앨범은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이 가능할 것같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최근 유행하는 일렉트로 재즈에 대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그러니까 20년전에 발표했던 앨범 <Future Shock>(Columbia 1983)이 최근 흐름의 시원이었다는 선언으로 바라보는 쪽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98년 버브를 통해 발표했던 <The Return Of The Headhunters>를 통하여 애시드 재즈를 비롯한 펑키 리듬이 가미된 재즈의 흐름에 대해 역시 시원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려 했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사실 허비 행콕의 장점은 그의 피아노 연주실력보다는 다소 복잡하고 현학적인 흐름으로 흐르고 있던 재즈의 흐름 속에서 리듬을 강조하여 과거 스윙이 향유했던 즐기는 재즈로서의 위치를 복권시키려 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앞으로 내다보는 견자적 시선이 음악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이 그의 음악이 단순한 춤용 음악으로 전락하지 않는 이유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번 앨범은 만족할 성과를 획득한다. 허비 행콕 본인은 물론 웨인 쇼터, 잭 드조넷 등의 연주자가 참여함으로서 재즈의 아류가 아닌 하나의 지류로서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 크레익 데이빗, A Guy Called Gerald같은 테크노 계에서도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는 음악인들이 참여해 최 첨단의 현대성을 부여한점, 그리고 이 두 가지 상이한 요소가 아주 적절하게 결합하고 있다는 점-여기에는 빌 라스웰의 능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이 이 앨범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앨범을 통해서 일렉트로 재즈가 테크노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재즈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대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회의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어디에 허비 행콕 본인이 위치하고 있느냐인 것이다. 방법론적으로 본다면 테크노적인 사운드 위에 재즈적인 연주를 입혀 나가는 닐스 페터 몰배의 진행을 보이는데 그럼에도 그 결과는 생 제르맹식의 방법에 더 가깝다. 즉 사운드를 주도하는 허비 행콕의 모습이 부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강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이미 <Panthalassa Remix>를 통해서 마일스 데이비스를 조각 내어 테크노화할 줄 알았던 빌 라스웰이다. 여기에 리듬의 측면에는 칼 크레익의 모습이 더 지배적이다. 연주자로서의 행콕은 웨인 쇼터처럼 초청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판을 벌려놓고 주인이 주인행세를 하지 못하는 꼴이다. 더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한 무임승차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결과로 다른 어느 일렉트로 재즈 앨범보다도 테크노적인 사운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 앨범에서 허비 행콕의 위치에 관한 것이니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말자. 그냥 조타수로서의 허비 행콕을 상상하도록 하자. 어디까지나 음악은 의외로 완결성을 획득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