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8일은 키스 자렛이 70세가 되는 날이다. (우리 나이로는 71세가 된다.) 늘 신선한 음악을 들려준 그였던 만큼 70세가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70세를 기념하기 위해 그와 ECM 레이블은 새로운 앨범 두 장을 선보였다. 하나는 즉흥 솔로 콘서트 앨범 <Creation>이고 다른 하나는 클래식 콘서트 앨범 <Barber/Bartók/Jarrett>이다. 재즈와 클래식을 아우르는 그의 활동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키스 자렛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으리라.
솔로 피아노 연주자 키스 자렛
키스 자렛 스스로도 피아노 솔로 연주자로서의 위치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즉흥 솔로 콘서트 활동이야 말로 자신은 물론 남들이 하지 않았던 분야를 개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다른 선배 연주자의 영향, 특히 빌 에반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굳이 그리 말한다면 자신은 아마드 자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렇게 그가 빌 에반스를 비롯한 선배 연주자의 영향을 부인했던 것은 단지 과거를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또한 누구와 비슷한 연주를 펼쳤던 시기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보적인 단계에서의 이야기이고 스타일리스가 되면 그 영향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것을 보여주게 된다. 즉, 스타일리스트로서의 키스 자렛은 클래식이건 재즈건 다른 누구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에만 집중하는 연주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만약 다른 누군가의 방식으로 연주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연주, 음악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 그의 솔로 콘서트 연주는 눈을 감고 들어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 그만의 색이 있다.
1971년 ECM 레이블의 제작자 맨프레드 아이허가 레이블에서의 첫 앨범으로 트리오 앨범-게리 피콕과 잭 드조넷이 함께 하는-을 제안했을 때 이를 거부하고 피아노 솔로 앨범을 녹음하고 싶다고 했던 것도 이 때문이리라. 게다가 이 때부터 그는 자신의 심상을 연주에 담아내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ECM에서의 첫 스튜디오 솔로 앨범 <Facing You>는 완벽한 작곡보다는 간단한 스케치를 기반으로 한 즉흥 연주를 담고 있다.
솔로 연주를 통한 자기 표현의 정점은 역시 즉흥 솔로 콘서트 연주였다. 이 솔로 콘서트는 <Facing You>를 발표한 이후 가졌던 독일 하이델부르그 공연에서 기존에 작곡된 곡을 이어서 연주하기 위해 즉흥적인 연주를 펼친 것에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Solo Concerts: Bremen/Lausanne>(1973)으로 시작해 <The Köln Concert>(1975)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특히 지금까지도 키스 자렛 최고의 앨범으로 평가 받는 <The Köln Concert>는 순간의 진실에 입각한 연주, 늦은 밤 정상적이지 않은 피아노로 표현한 키스 자렛의 내면이 공연 현장의 관객과 앨범의 감상자 모두에게 전달 되었을 때 커다란 감동을 만들어 냄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솔로 콘서트에서 키스 자렛은 다양한 음악 양식을 혼용하며 재즈의 영역에 한정 지을 수 없는, 그렇다고 클래식을 비롯한 다른 장르에도 넣을 수 없는 그만의 연주를 펼쳤다. 그런데 다양한 음악 양식의 사용은 계산된 것도 아니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연주하면서 자연스레 발현된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순간의 감흥에 따라 다양한 음악 양식을 자유롭게 활용하며 그는 멈춤 없이 장시간 지속되는 솔로 연주는 마치 살아 숨쉬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새로운 건축
그의 솔로 콘서트 연주는 미쳤다 싶을 정도의 집중과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젊음, 건강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연주였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 만성피로 증후군으로 몇 년간 연주활동을 쉬고 다시 2000년대 연주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전처럼 연주하기엔 무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꼭 그렇게 연주해야 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다. 쉬면서 그는 그 전까지 이루어진 자신의 솔로 앨범을 차근차근 다시 들어보았다. 그 결과 자신이 너무나도 많은 음을 사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솔로 콘서트 연주를 하게 된다면 이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연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쌓아 놓은 거대한 건축물을 부수고 새로운 쌓기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2002년 일본 공연을 담은 앨범 <Radiance>는 그 새로운 시작을 알린 앨범이었다. 이 앨범에서 그는 이전의 쉼 없는 긴 연주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짧은 여러 개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아프기 전보다 내면적인 성향의 연주였다. 이전 솔로 콘서트에 익숙한 감상자들에게는 분명 낯선 형식의 연주였지만 그 감동은 여전했다. 이것은 다시 2005년의 <The Carnegie Hall Concert>, 2008년의 <Paris / London: Testament>, 2011년의 <Rio>로 이어졌다. 그렇게 키스 자렛의 새로운 솔로 콘서트 연주 방식은 자연스레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했다.
또 다른 창조적 변화 <Creation>
그리고 이번 70세 생일을 기념하는 새로운 솔로 콘서트 앨범 <Creation>이 발매되었다. 그런데 이번 앨범에서 피아노 연주자는 단순히 자신의 70세 기념에 그치지 않고 나이를 잊은 새로운 음악적 열망을 을 드러낸다. 앨범 타이틀이 ‘창조’를 의미하는 ‘Creation’인 것이 이를 말한다. 그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는 간단하면서 흥미롭다. 지난 해 그는 5월부터 7월 사이에 토론토, 도쿄, 파리, 로마에서 6차례의 솔로 콘서트 공연을 펼쳤다. 그런데 이 솔로 콘서트를 각각의 앨범으로 발매하는 대신 그 각각의 공연을 종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후 내적인 연관성을 지니는 연주를 선별해 하나의 앨범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관객을 앞에 둔 솔로 콘서트 녹음이면서도 음악적 지향점을 갖고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듯한 앨범이 만들어졌다.
이번 앨범을 그냥 2014년 솔로 콘서트 연주의 베스트 트랙 모음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의도였다면 트랙들을 녹음 순서대로 정리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게다가 9개의 트랙들의 유기적 연결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 베스트 트랙 모음 이상을 생각하게 한다. 예를 들면 ‘Part 1’에서 6월 25일 토론토의 로이 톰슨 홀에서의 연주가 인상주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가 싶더니 5월 9일 도쿄 키오이 홀에서의 연주가 ‘Part 2’로 등장해 앞선 긴장을 정갈한 서정으로 완화한다. 그리고 키오이 홀에서 녹음된 또 다른 트랙이 ‘Part 5’로 등장해 앨범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을 발산한다. 이처럼 새로이 설정된 흐름을 따르고 있기에 각 트랙들은 각각의 다른 시공간에서 녹음되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한 공간에서 순간순간의 정서적 상태에 따라 연주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키스 자렛에게 여러 콘서트를 가상의 공간에 모으는 이번 작업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앨범 <Radiance>에서 2002년 10월 27일의 오사카 공연과 10월 30일의 도쿄 공연을 하나로 모았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때는 이번 앨범처럼 그렇게 정교하지는 않았다. 오사카 공연에 도쿄 공연 일부를 후반부에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다만 이 때부터 그는 편집을 통해 새로운 이상적 음악을 만들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한편 제작 방식은 달라도 연주에 있어서는 노장다운 여유와 사색적 깊이가 더 많이 느껴진다는 것 외에는 지난 10여년 사이 발매된 그의 솔로 콘서트 앨범들과 아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순간의 진실을 따랐던 지난 솔로 콘서트 앨범과 달리 각 트랙들이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정렬되었다는 것, 그래서 주제에 대한 호기심으로 앨범을 감상하게 한다는 것은 분명 새롭다.
논어(論語)에서는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했다. 마음이 하고 싶은 바를 따르더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나이라는 것이다. 타인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진정한 자유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일까? 오히려 세상의 법도가 오랜 시간에 걸쳐 내면화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키스 자렛 만큼은 이번 새로운 앨범을 통해 진정한 종심의 상태를 보여주었다. 오로지 자신의 음악에만 집중하는 자유. 그런데 이런 자유로운 음악을 1960년대부터 보여주었던 만큼 어쩌면 그는 지금도 청춘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70이라는 사실에 덤덤할 지도 모른다. 부디 그런 자유로운 정신이 오래 지속되어 계속 새로운 감동을 만들어 내기를 바란다.
주문한 앨범이 도착해서 듣고 있습니다.
댓글을 좀 길게 쓰다가… 순간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다 지웠네요..
연주를 듣는 이 순간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려다 지우셨는지 궁금하네요.
키스 자렛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ㅎ
아..그게..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앨범을 듣기 전에 전 단순히 ‘빌 에반스 뒤를 잇는’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앨범을 듣고 나니, 그냥 키스 자렛..그 자체네요.
그리고 이 앨범에서 일관된 음악적 지향점을 갖는다는게…
제가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각 트랙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뭔가 다른 느낌이 들어 트랙숫자를 확인해보면..다른 트랙이네요. 특히 1-5번 사이는 특히나 긴밀히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마치 피아노 소나타 몇번의 전곡을 듣는 느낌이랄까요…
중간 중간 들리는 키스 자렛의 허밍도,(다른 앨범에서도 들은 것 같아요…)
의도했다기 보다 연주에 집중하다 그냥 터져나오는 듯 해서 신선함도 느껴집니다.
지금도 감상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정말이지…참 좋습니다..
허밍은 의도가 아닌 즉흥인 것이구요. 이 앨범은 여러 공연을 의도를 갖고 편집한 것이죠. 그래서 연결되는 느낌이 더 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순간적으로 어떻게 이런 상상이 가능할까 경탄하게 만드는 연주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