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격, 개성은 불변한다고 해도 대화 상대에 따라 그 개인적인 측면이 드러나는 양상은 매우 다르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나는 변한 것이 없음에도 명(明)과 암(暗)을 오갈 수 있다. 이를 재즈에 국한해 생각하면 연주자는 어떤 연주자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운 음악적 활력이 필요할 때 어떤 연주자는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곤 한다. 그래서 상대 연주자로부터 새로운 음악적 자양분을 얻어 내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실제 재즈사를 빛낸 앨범들 가운데 상당 수는 개성과 실력을 겸비한 연주자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또 이런 모험적인 만남은 신선하다 못해 싱싱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일시적이란 이유로 아이디어 차원에서 머물러 아쉬움을 주기도 한다. 이럴 때면 비교적 긴 시간을 두고 대화에 대화를 거듭해가며 보다 잘 정돈되고 숙성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정규 워킹 밴드의 존재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결국 이상적인 것은 서로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면서 그 관계를 오래 지속시켜 날이 갈수록 발전을 거듭하는, 때로는 연속과 불연속의 중간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연주자들의 조합이 아닐까 싶다.
피아노 연주자 비안, 베이스 연주자 이원술, 드럼 연주자 한웅원으로 이루어진 트리오 클로저가 어쩌면 그런 경우가 아닐까? 트리오를 구성하고 있는 세 연주자는 각자 리더로서 강한 개성을 보여준 바가 있다. 그 결과 비안은 아름다운 서정성이 돋보이는 피아노 연주자로, 이원술은 실험성, 정교함이 어우러진 음악을 추구하는 베이스 연주자로, 한웅원은 다채로운 텍스트에서도 안정적이고 능숙하게 자리를 지키는 유연한 드럼 연주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개성 강한 실력파 연주자들이 뭉쳤으니 트리오 클로저는 기대해도 좋을 프로젝트 밴드라 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이 트리오는 ‘비안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지난 2012년부터 함께 해 온 그들만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트리오는 지속성을 지닌 프로젝트 밴드라 하면 좋을 것 같다.
실제 2년여의 숙성과정을 거쳐 이번에 발매된 트리오의 첫 앨범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비단 곡마다 다양한 리듬을 사용하고 비밥, 라틴, 아방가르드 등의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엽적인 부분이다. 그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을 자유롭게 가로질러 자신들만의 것을 만들어 내는 것에 있다. 즉, 다양한 상황에 잘 적응하는 트리오의 모습이 아닌 그 다양성 속에서 일지 않는 트리오만의 동일성, 색이다. 그렇다고 트리오가 아주 대단하게 색다른 질감의 사운드를 보여준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연주력과 인터플레이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특히 세 연주자의 인터플레이는 이 앨범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앨범 타이틀과 트리오의 이름에 걸맞게 세 연주자는 경청을 통해 서로에게 가까이(Closer)가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그대로 유지하며 함께 한다(Coexistence). 그 결과 트리오의 연주는 비안의 낭만성, 이원술의 정교한 긴장, 한웅원의 화려한 안정성이 어우러져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을 띤다.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이면서도 그 세부에는 아기자기한 다양성을 품고 있는 연주. (어쩌면 빌 에반스가 스콧 라파로, 폴 모시앙과 함께 제시했던 이상적 트리오의 모습, 나아가 키스 자렛 트리오를 통해서 경험했던 트리오의 전형에 감히 견줄 만 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이것은 분명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얻어낸 서로에 대한 이해와 각각의 활동을 통해 형성된 차이가 주는 긴장에서 비롯된 성과이다.
나는 이 트리오가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 연주자가 이 트리오 활동만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각자 다른 만남을 통해 또 다른 음악을 추구하고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만나는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늘 새로운 긴장과 친근한 편함이 어우러진 음악으로 감상자와 공존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