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에반스 오리지널 트리오(Bill Evans Original T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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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사의 전개를 보면 루이 암스트롱,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같은 확고한 자신만의 색을 지녔던 스타일리스트 들이 중심으로 등장하지만 몇몇 부분에 있어서는 한 스타일리스트가 이끌었던 밴드 전체가 중심이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그 가운데에는 밴드 스타일의 원형이라 하여 “The”, “Classic”이라는 한정을 붙여주기도 한다. The Miles Davis Quintet, John Coltrane Classic Quartet 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외에 Original이라는 한정이 붙여진 밴드도 있다. 바로 스콧 라파로, 폴 모시앙이 함께 했었던 빌 에반스의 트리오다. 이 트리오는 Bill Evans Original Trio라 불린다.

이 빌 에반스 트리오는 인터플레이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확립하는데 일조했으며 나아가 현재의 키스 자렛, 브래드 멜다우를 비롯한 많은 연주자들에게 트리오에 원형을 제시했다.

Before Original Trio

밥 브룩마이어, 리 코니츠, 토니 스콧 등의 세션 연주자로 활동했지만 진정한 빌 에반스의 음악적 발전은 다른 많은 연주자들처럼 마일스 데이비스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58년 2월부터 11월까지 9개월간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러면서 당시 모드 중심의 연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클래식을 활용한 스케일을 소개하며 보다 내면적이고 서정적인 사운드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마일스 데이비스 또한 그의 피아노 연주에 만족했다. 하지만 당대 최고라 불리는 재즈 밴드에 백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많은 흑인 감상자들은 참기 어려웠던 오양이다. (여기에는 흑인을 차별하는 당시 미국 상황에 대한 흑인들의 반동적 심리도 한 몫 했다.) 그래서 빌 에반스는 백인이기에 스윙하지 않는다는 식의 비평이 그의 뒤를 쫓아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잘 못된 것이었다. 빌 에반스는 당시 스윙을 안으로 감춘 새로운 스타일의 피아노 연주를 완성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연주는 보수적인 재즈 감상자들에게 낯설게 비추어졌고 그래서 스윙 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사게 된 것이다. 아무튼 흑인들의 반감을 평소 내성적이었던 빌 에반스는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마일스 데이비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병을 이유로 밴드를 탈퇴하게 되었다.

그런데 빌 에반스가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를 탈퇴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만의 밴드를 갖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번에 스콧 라파로와 폴 모시앙으로 구성된 트리오가 결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빌 에반스는 1956년 <New Jazz Conceptions>(Riverside)라는 트리오 앨범을 녹음한 이력이 있었다. 리고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를 탈퇴한 후 곧바로 필리 조 존스(드럼), 샘 존스(베이스)와 함께 <Evebody Digs Bill Evans>라는 앨범을 녹음 녹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앨범을 위해 만들어졌던 트리오는 빌 에반스의 음악을 위한 트리오라 하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았다. 베이스와 드럼은 그저 빌 에반스의 피아노를 뒷받침하는 역할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에반스의 인상주의에 대한 경도를 확인하게 해주는 “Peace Piece”같은 인상적인 곡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이 때문에 재즈사는 아직 빌 에반스의 진정한 트리오가 결성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그렇기에 스콜 라파로, 폴 모시앙이 함께 한 트리오가 실질적으로는 빌 에반스의 세 번째 트리오라 할 수 있음에도 첫 번째 트리오라는 평을 받고 있는 것이다.

Original Trio

그렇다면 무엇이 스콧 라파로, 폴 모시앙이 함께 한 트리오를 오리지널 트리오라 부르게 한 것일까? 그것은 평소 빌 에반스가 꿈꾸었던 트리오의 이상이 최적화되어 드러났기 때문이다. 빌 에반스는 기존 트리오보다 역동적인 트리오를 상상했다. 이를 위해서는 빌 에반스 이전의 트리오 연주 방식과 빌 에반스가 생각한 트리오 연주 방식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먼저 빌 에반스 트리오 이전의 트리오 연주는 그 진행에 있어 평면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그것은 세 연주자 가운데 한 명이 솔로를 펼치는 동안 다른 두 연주자는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솔로 순서를 기다리는 연주 방식에서 확인된다. 즉, 순차적인 솔로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베이스와 드럼에게는 형식적으로 솔로가 허용되는 경향이 강했고 주로 피아노 연주자가 솔로 연주를 펼치고 마무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스윙 시대에 비해 코드나 리듬의 전개에 있어 보다 자율성을 획득했다고는 하지만 트리오 연주 양식 자체는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경향이 강했다. 많은 사람이 버드 파웰을 최고의 비밥 피아노 연주자로 기억하지만 그의 트리오 연주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나 빌 에반스 트리오는 이러한 경직된 연주 방식을 깼다. 빌 에반스는 트리오의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세 연주자가 동시에 자신만의 연주를 펼치는 트리오를 상상했다. 그의 생각에 한 연주자, 예를 들면 피아노 연주자가 솔로를 펼칠 때 다른 연주자, 예를 들면 베이스 연주자가 피아노 연주에서 어떤 영감을 얻어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화답하고 싶음에도 참고 자기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불합리했다. 즉, 어느 순간 다른 연주자의 연주에서 무엇인가 자극을 받았으면 바로 이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빌 에반스의 이런 생각은 현재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또 누구나 하고 있는 연주 방식이다. 하지만 빌 에반스 이전에는 이런 연주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렇게 솔로의 순서와 상관없이 세 연주자가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진정한 상호연주-인터플레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연주가 즉흥적으로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받게 되면서 전체 사운드 또한 그 전개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즉흥적 역동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상상해보라. 같은 곡을 연주하지만 매번 다르게 자극을 주고받아 늘 새로운 사운드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빌 에반스가 꿈꾼 트리오 연주가 바로 이러한 역동적 트리오였다. 그리고 스콧 라파로, 폴 모시앙과 함께 하면서 그 꿈을 현실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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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 장의 앨범

1959년 운명적으로 만난 이후 빌 에반스 트리오는 총 넉 장의 앨범을 녹음했다. 그 가운데 트리오의 첫 앨범인 <Portrait In Jazz>는 1959년에 녹음되었고 나머지 <Exploration>,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Waltz For Debby>는 모두 1961년에 녹음되었다.

그 가운데 첫 앨범 <Portrait In Jazz>는 말끔하게 성장(盛裝)한 빌 에반스의 모습이 인상적인 표지를 하고 있는데 그만큼 앨범의 내용은 강한 자신감에 차 있는 빌 에반스와 그 트리오 연주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연주는 언급했던 대로 평소 빌 에반스가 생각하고 있었던 이상적인 트리오의 첫 번째 실현을 의미했다. 즉, 재즈의 초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피아노 트리오의 초상을 제시했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앨범을 들어보면 빌 에반스는 정교하게 짜여진 코드와 멜로디를 공평하게 병행하고 있으며 여기에 스콧 라파로의 베이스가 반주자의 역할을 넘어 고역대의 솔로로 빌 에반스와 동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위치에 올라와 전체 사운드를 더욱 정교하게 해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어느 순간에는 빌 에반스가 아닌 스콧 라파로의 베이스가 전체 사운드의 흐름을 이끄는 순간도 발생한다. 폴 모시앙의 경우 이 앨범에서는 적극적으로 앞으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두 연주자를 지원하며 가끔씩 제 3의 솔로 연주자로 짧게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한다.

1961년 2월까지 빌 에반스 트리오는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각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동시에 조화를 이루는 트리오 양식을 보다 확고하게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것을 앨범에 담았는데 그것이 바로 <Explorations>였다. 연주 당일 스콧 라파로와 빌 에반스의 언쟁이 있었을 정도로 긴장 속에서 녹음된 이 앨범은 그래서인지 <Portrait In Jazz>보다 사운드가 훨씬 더 예민한 맛을 준다. 그리고 이것은 녹음 당시의 긴장 이전에 전작에서 시도했던 인터플레이 중심의 트리오 연주가 양식의 차원을 넘어 세 연주자에게 체화(體化)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양식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이를 넘어 정서적 차원에 보다 더 여유롭게 신경을 쓸 수 있게 된 결과였던 것이다. 그 결과 빌 에반스는 오른손 멜로디를 완벽하게 감싸는 왼손 코드의 진행을 더욱더 정교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전체 사운드에 새로운 질감을 부여했으며 이에 스콧 라파로는 보다 더 자유로운 솔로를 펼치고 폴 모시앙 또한 이후 그를 대표하게 되는 심벌즈의 미묘한 뉘앙스를 중심으로 한 연주를 펼칠 수 있었다.

<Explorations>를 발매 한 이후 트리오는 공연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6월 중순 2주간 빌리지 뱅가드 클럽에서 공연을 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당시 트리오 멤버는 평단의 주목을 받고 인기 투표에서도 상위에 오르곤 했지만 홍보 부족 때문이었는지 극히 적은 관객을 앞에 두고 공연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2주 후에는 커다란 호응을 받는 인기 트리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빌리지 뱅가드 공연 중 트리오는 6월 25일 공연을 녹음했다. 이날 트리오는 오후에 두 번, 저녁에 세 번 각 30분씩 네다섯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모든 연주는 그동안 빌 에반스 트리오가 추구했던 동시적 인터플레이, 정교한 코드 보이싱에 의한 섬세한 질감 중심의 지성적 사운드를 최상의 상태로 드러냈다. 그리고 특히 스콧 라파로의 베이스 연주는 빌 에반스 이상으로 다양한 창조적 기교와 섬세함으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것은 공연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겠지만 그로부터 열흘 뒤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마지막 장대한 불꽃이었다.

그래서 원래 이 빌리지 뱅가드 실황은 한 장의 앨범으로만 발매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 제작자였던 오린 킵뉴스는 스콧 라파로의 극적인 사망과 공연에서의 뛰어난 연주로 인해 그의 베이스가 돋보이는 연주를 따로 모아 앨범으로 발매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앨범은 <Live At The Village Vanguard>라는 타이틀로 빌 에반스의 피아노와 전체 트리오가 보다 공평하게 조화를 이룬 앨범 <Waltz For Debby> 보다 먼저 발매되었다. 이를 통해 그만큼 스콧 라파로의 존재감이 빌 에반스 트리오에게 있어 중요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Trio 그 후

빌 에반스의 첫 번째 트리오는 그 역사적 가치만큼 많은 것을 아쉬움으로 남기고 사라져야 했다. 그것은 상기했다시피 스콧 라파로의 어이 없는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어쩌면 더욱 더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던 트리오의 비상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빌 에반스는 커다란 상실감에 빠져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물론 베이스 연주자 척 이스라엘, 게리 피콕 등과 트리오를 이루어 녹음하기도 했지만 1966년 에디 고메즈를 만나기 전까지는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호흡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대신 그는 솔로 활동에 더욱 더 충실하게 되어 <Conversation With Myself>(1963)같은 또 다른 명작을 남기게 된다.

6 COMMENTS

  1. 빌 에반스 노래를 듣고 찾아왔어요. 궁금한게 있는데요, 빌 에반스의 곡을 과제 배경음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빌 에반스의 곡 저작권에 대한 내용을 찾기 힘들어서 이렇게라도 여쭤봐요.

    • 어떤 발표인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저작권법에 위반 되는 사항일 겁니다.
      작곡 외에 공연권에도 저촉될 수 있죠.
      여럿이 모인 장소에서 음악을 내보내는 것이니 말이죠.
      그런데 외부에 널리 공표되지 않는 수준의 ppt 같은 것이라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냥 한번 제출하고 끝나는 것이니 말이죠.
      물론 엄밀히 다지면 이 또한 문제 될 수 있긴 하겠지만 말이죠.

  2. 왜 이제야 이 매거진을 발 견했나 모르겠네요ㅎㅎ 힙합, 알앤비, 락을 좋아하고 정작 재즈에는 문외한이었는데 재즈스페이스의 글 몇개를 읽고 깊이 영감받고 빠져든 지나가는 여고생입니다 ㅎㅎㅎ
    좋은 글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3.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이었는데…한동안 Bill Evans를 잊고 있었습니다. ‘언덕위의 아폴론’이란 애니를 보고 다시 빌에반스 음악을 감상하고 있습니다만..들을때마다 새롭네요.ㅜ

    • 오래된 연주지만 지금도 새롭죠. 그러면서도 시간의 흐름 속에 만들어진 향수 같은 것도 있구요. 저도 어제 몇 곡 들었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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