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노트나 ECM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재즈에서 레이블은 연주자나 앨범들의 집합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분명 경제적인 목적으로 움직이는 기업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개인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재즈 레이블이 대부분 (레이블을 설립한) 제작자 한 명의 취향, 신념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제작자는 대형 음반사에 외면 받은 재즈 연주자를 발굴하고 그들의 음악이 현실화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제작자에 의해 재즈 레이블의 음악적 색이 결정되는 만큼 제작자의 앨범 제작 활동은 직접 재즈를 연주하는 것만큼이나 음악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렇기에 유독 재즈 레이블이 많은 것일까?
푸른 색의 로고가 미래지향적의 신선함을 주는 ACT 레이블도 다른 재즈 레이블들처럼 한 명의 재즈를 사랑하는 의욕 있는 제작자 지그프리드 로흐에 의해 1992년 설립되었다. 그는 19세 때부터 30여 년간을 EMI, 필립스, WEA 등의 메이저 음반사의 유럽 쪽 경영자로 일하며 음반 산업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베테랑이었다. 그리고 15세 무렵 시드니 베셰의 연주에 매혹된 이래 재즈를 사랑해 온 애호가였다. 그는 평소 음반사에서 일하면서 블루 노트, 버브의 초창기 시절처럼 제작자인 자신의 취향으로 연주자를 발굴하고 그들의 앨범을 제작하며 직접 경영도 담당하는 독립 레이블을 꿈꾸었다. 그래서 필립스 재직 당시였던 1963년에는 아직 무명이었던 색소폰 연주자 클라우스 돌딩거의 앨범 <Jazz Made In Germany>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뛰어난 업무 능력 때문이었는지 독립할 기회는 좀처럼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47세였던 1987년 WEA 독일의 사장직에서 물러나 일 년 후가 되어서야 ACT 레이블을 설립할 수 있었다.
그가 ACT를 설립하고 처음에 한 일은 폴리그램사의 앨범을 라이선스로 발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생각처럼 잘 진행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는 잠시 음반 산업계를 떠나 스페인에 머물렀다. 하지만 아직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1992년 다시 ACT를 재건하고 본격적인 앨범 제작활동을 시작했다. 다른 독립 레이블들의 제작자가 그러하듯 처음부터 그는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앨범을 제작하기로 했다. 평소 그는 재즈를 기존으로 유럽의 포크, 클래식 월드 뮤직 등을 좋아했다. 특히 스페인에 체류하고 있던 터라 플라멩코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ACT의 첫 앨범은 빈스 벤도사가 이끄는 WDR 빅밴드에 마이클 브레커, 존 맥러플린 등의 유명 연주자와 플라맹코 연주자들이 함께 한 <Jazzpaña>가 되었다. 유럽의 전통 음악과 미국의 재즈가 만난 이 앨범은 사실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만남이 만들어 낸 신선한 사운드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결과 그래미상 2개 부분의 수상 후보로 오르는 등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Jazzpaña>의 성공은 앞으로 ACT 레이블이 나아갈 방향을 그대로 제시했다. 꾸준히 지그프리드 로흐는 재즈의 지평을 확장하는 실험적인 성향의 연주자들의 발굴에 주력했다. 그래서 베트남 출신의 부모를 둔 프랑스의 기타 연주자 엔기엔 레가 처음으로 ACT와 계약을 맺고 앨범 활동에 나섰다. 이 기타 연주자는 지미 헨드릭스를 느끼게 해주는 기타 톤과 베트남과 유럽의 색채가 결합된 독특한 질감의 사운드로 유럽 재즈계에 신선한 바람을 가져다 주었다.
한편 ACT는 유난히 스웨덴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 연주자들의 앨범을 많이 제작했다. 펑키 재즈와 발라드를 넘나드는 트럼본 연주자 닐스 란드그렌, 그와 스웨덴의 포크 음악을 연주하며 인연을 맺게 된 후 현대 재즈 피아노 트리오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게 되는 에스뵤른 스벤슨, 서정적 멜로디를 써내려가는 베이스 연주자 라스 다니엘슨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또한 피아노 연주자 미카엘 볼니의 앨범 제작을 계기로 ‘Young German Jazz’라는 이름으로 젊은 독일 연주자들의 앨범을 잇달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줄리안과 로만 바세르푸르 형제, 마티아스 슈리플, 얀 제흐펠트 등의 연주자들이 ACT 레이블을 통해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이 외에도 불어나는 카탈로그를 효율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지그프리드 로흐는 몇 개의 작은 주제에 의한 시리즈를 만들고 이에 맞추어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는 볼프강 해프너의 <Shapes>로 대표되는 누 재즈 시리즈, 요아힘 쿤, 다닐로 레아, 돈 프리드만, 크리스 바이에르 등의 피아노 연주자의 솔로 연주를 모아 놓은 <Piano Works> 시리즈, 그리고 빅토리아 톨스토이, 이다 산트, 리그모 구스타프손 등의 보컬 앨범 시리즈 등이 있다.
갈수록 ACT 레이블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세계 각국의 연주자들이 ACT에서 앨범 녹음을 희망하고 있다. 최근에만 해도 프랑스에서 성공한 이스라엘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야론 헤어만, 미국 출신의 피아노 연주자 비제이 아이어, 색소폰 연주자 루드레쉬 마한타파, 폴란드 출신의 트럼펫 연주자 베르네리 포욜라, 한국의 나윤선 등이 앨범을 녹음했으며 모두 호평을 받았거나 받고 있는 중이다.
20년의 세월 동안 ACT의 로고를 달고 발매된 앨범들은 300장이 넘는다. 최근에는 발매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그럼에도 앨범의 음악적 품질은 언제나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그프리드 로흐가 직접 제작하지 않은 앨범들도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보컬 시리즈 앨범들은 닐스 란드그렌이 주로 제작을 담당하고 있으며 중견 연주자들의 앨범들 다수는 연주자가 직접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ACT의 신선도는 변함이 없는데 이것은 지그프리드 로흐가 직접 제작을 담당하지 않았더라도 모두 그의 음악적 방향을 잘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그프리드 로흐의 취향이 ACT의 활동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ACT 레이블이 70세가 넘은 노장 제작자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또한 음악적 역량을 지닌 신예를 발굴하고 이를 통해 재즈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에 그가 만족하고 있다고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지그프리드 로흐의 음악 철학은 단순하다. 자신과 취향을 공감하는 감상자, 귀와 마음이 새로운 음악에 열려 있는 감상자를 위한 앨범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업적인 측면 이전에 음악적인 만족도를 우선으로 고려했기에, 제작자 자신은 물론 연주자와 감상자 모두를 아우르는 제작을 해왔기에 ENJA, ECM 등 뮌헨에 이웃한 세계적인 선배 재즈 레이블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