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은 슬라보예 지젝의 책이다. 인문 사상에서도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 있다면 최근에는 지젝이 유행을 타는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책에 대한 번역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아서 쉽게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실제 몇 해전 지젝 읽기를 시도했다가 번역이 너무나도 엉망이기에 그만 둔 적이 있다.
책 한 권으로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말 한다면 지젝은 철학자이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직접 건드리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철학자들이 근원적인 것에 대한 탐구를 추상적인 방식으로 한다면 그는 선배 철학자들의 사유방식을 현실에 직접 적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 쉽게 읽히지 않나 싶다. 그렇기에 또 주목 받는 것일 테고.
이 책은 폭력을 주제로 하고 있다. 여기서 폭력이란 피를 부르는 물리적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드러나는 ‘주관적 폭력’이 아니라 뒤에 은밀히 숨어서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객관적 폭력은 상징적이고 또한 구조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객관적 폭력은 일종의 위선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즉, 주관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듯한 자세 뒤에 그보다 더한 상징적, 구조적 폭력을 지닌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업의 사회활동을 생각하자. 한 기업이 수익의 몇%를 가난한 자를 위해 기부한다고 했을 때 그 자체는 선한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그 수익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그 기부 활동은 회사의 근본적인 폭력을 가리는 위선이 된다. 아프리카 어린이의 눈물이 배어 있는 커피를 팔아 수익금의 극히 적은 일부를 아프리카 기아 해결을 위해 내놓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것은 자신들이 빈곤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음을 회피하는 행위다. 선진국들이 후진국을 원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젝은 우리의 관용, 종교, 정치, 언어 등에 숨겨 있는 폭력을 폭로해 나간다. 이를 위해 그는 라캉, 니체, 마르크스, 헤겔, 칸트 등의 사상을 작용하고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내전, 파리의 폭동, 911사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 등 구체적인 사건들을 비틀어가며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 나간다. 그런데 그렇게 드러나는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은 결국 정치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설정된 목표-예를 들어 정의사회 구현 같은-는 허울이고 실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리저리 헤쳐모여를 하는 정치인들처럼 객관적 폭력은 결국 테러 등의 주관적인 폭력을 없애려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주관적 폭력을 충동하고 나아가서는 이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일단 기다리며 두고 보는 것 자체가 이러한 폭력을 해결하는 방법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이 말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긴 하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아프리카의 모든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서 결국 착취할 노동자가 없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야 이 폭력들이 드러난다는 것이 아닌가? 어찌 보면 객관적 폭력에 대한 사유 자체도 비관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젝의 지적 자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의 지적은 매우 옳다. 자본주의의 세상은 궁극적으로 선으로만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 폭력의 가해자 입장에 선 사람들은 지젝을 조용한 혁명가, 이상주의자로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젝의 지적을 염두에 둔다면 폭력 자체가 완화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