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코너 – 존 치버 (박영원 역,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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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존 치버의 장편이다. 소설 홍보 문구를 보면 ‘<타임>지가 선정한 최고의 영미 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 나온다. 책 뒤에 실린 역자 해설이나 A.M. 홈즈의 상찬을 보면 100선의 하나를 넘어 최고의 영미 현대문학 작품으로 그쪽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나 싶다.

그렇지만 팔코너라는 교도소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소설을 처음 읽으면 그 화려한 호평들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소설 전개 자체가 그리 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미 소설 상당수가 그런 경향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글쓰기 자체가 3인칭 시점이면서도 독백 투의 느낌을 준다. 그래서 되는대로 이야기를 하는-즉흥적인 느낌마저 드는데 그것이 대단한 감동적 서사를 기대한 독자들을 배반한다. 후반에 보다 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사건이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 소설이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출판사의 설명을 보면 ‘물리적 구금이 야기할 수 있는 정신적 고통에 주목하며, 타인으로부터, 삶으로부터, 그리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가는 인간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나온다. 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믿고 책을 읽으면 오히려 소설의 진가를 잘 느끼지 못하지 않나 싶다. 그보다는 교도소-폭력의 위험, 동성애의 위험이 있는 곳이지만 그 곳에서도 사람들은 적응하고 그 환경에 맞는 환상을 품으며 살아감을 작가가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오독한 것일 수 있지만 나는 이것이 무엇보다 먼저 느껴진다. 마약에 중독되어 형을 살해한 죄로 들어온 대학교수 패러것이 처음에는 교도소에 낯설어 하지만 다른 성향의 죄수들과 친해지고 또 싫어하고 또 사랑 속에 동성애를 나누는 과정을 보라 거기에는 일체의 폭력과 억압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성의 몰락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마약에 찌들도 가족과 반목하고 불안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던 교도소 밖보다 더 안온한 일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물리적 제약이 있는 공간인 교도소의 풍경을 통해 작가가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창살 사이로 비치는 작은 햇살에 감사하고 지난 시절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 이상으로 황홀해 할 수 있는 주인공의 교도소 생활이야 말로 어찌 보면 정신적으로는 더 안정적인 생활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작가가 교도소의 삶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교도소의 삶을 그린다. 이것이 교도소의 삶도 그 밖과 다르지 않는 사회적인 공간임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열린 결말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우발적인 탈출이 나는 ‘쇼생크 탈출’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탈출하고 나서 이내 부상을 입고 거리를 헤매는 패러것의 상황이 이를 말한다. 그는 다시 교도소보다 황량한 공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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