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 세르주 투비아나, 앙투안 드 베크 (한상준 역, 을유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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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에 최근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하나씩 찾아서 챙겨보는 중인데 마침 그의 삶을 다룬 전기가 있어 읽어보았다. (사실 유명인의 전기를 읽는 것에 그리 관심이 없는데 요즈음은 이상스레 관심이 많이 간다.)

대부분의 전기가 그러하듯 책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과정을 800페이지가 좀 안 되는 분량에 걸쳐 차근차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 감독이 된 후부터는 작품에 따라 그 배경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긴 늘 영화만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이니 이런 서술 자체가 적확한 방식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매일같이 영화를 보고 또 보고 책을 읽고 시나리오 구상을 했다. 나는 그런 그의 삶이 부럽다.

이 책을 통해 나타난 프랑수아 트뤼포라는 사람은 자신만의 삶의 방식, 철학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 화두 가운데 하나인 좌/우파 사이에서 늘 긴장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것은 어디에도 참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전체적으로는 좌파 쪽에 가까웠지만 그는 사안에 따라 자신의 주관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약자에 대한 옹호였다. 순간적인 상황만 보고 판단한다는 여기에는 비판이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좀 달랐다. <카이에 드 시네마>잡지에서 글을 쓰면서 구 시대의 감독들을 비판하고 장 뤽 고다르 등과 함께 누벨 바그 영화를 주창했다는 것이 이를 말한다. 이를 위해 동료 영화인들과 연합하여 구시대를 공격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작가주의’라는 것이 결국 영화의 예술적 특성을 고취하고 현대 영화의 근간을 이루었음을 생각하면 이를 뭐라 할 수는 없을 듯.

그는 어린 시절 그리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그를 짐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여성과 관련된 그의 삶은 일반인이 보기에 그리 바람작하지 못했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 주연 배우와 사랑에 빠졌으니 말이다. 이자벨 아자니만 우정으로 남았을 뿐. 그런데 아자니 외에 파니 아르당, 카트린느 드뇌브 등 그가 사랑한 여배우들이 프랑스 영화의 대 배우들이라는 것이 놀랍다. 아무튼 그의 이런 사랑은 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별로 귀결되었는데-마지막 연인인 파니 아르당은 예외일까?- 그것은 그의 독특한 연애관 때문이었다. 뭐랄까?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하면서도 혼자만의 시간, 영역은 침범 받고 싶지 않은 사랑을 추구하지 않았나 싶다. 쉽게 생각하면 이기적인 사랑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그의 사랑에 아주 많이 공감한다. 어쩌면 그에게 최고의 사랑은 영화였을 것이다. 여자는 그 다음. 그래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 때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것 말고 사랑을 하면서 완전히 상대에 몰입하여 자신을 잃는 것을 그는 두려워 했던 것 같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의 상당수는 자신과 그 친구의 이야기를 변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그의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예를 들어 <400본의 구타>같은 경우는 완전히 그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의 성공 이후 가족과 갈등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연애사 또한 이후 영화에 조심스레 변용되기도 했다.

한편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몰랐던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초기작 <미지와의 조우>에 트뤼포가 박사역으로 출연했었다는 것. 왠지 스필버그와 트뤼포는 시대적으로 겹치지 않는다 생각했었는데 놀라웠다.

나름 트뤼포의 삶을 잘 조명하고 있다지만 내 입장에서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영화 음악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물론 그가 조르쥬 들르뤼와 좋은 호흡을 유지했다는 언급은 있지만 기왕이면 작곡가의 인터뷰를 통해 음악에 대한 트뤼포의 취향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재즈를 가까이 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재즈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부분이 궁금하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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