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조중걸 (프로네시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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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가끔 사용하는 키치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는 ‘졸작, 저속한 작품’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일은 드물고 일종의 싸구려 취향, 작품을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나 또한 그런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현재의 키치는 여기에 저속한 것이 아니라 그 저속함을 이용한 작품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또 다른 중층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정의가 갈수록 모호해지는 듯하다.

저자는 이러한 키치의 발생과 의미를 탐구한다. 그래서 키치가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이전 귀족들의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를 따르려 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맛은 느끼지 못하는 모방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경향이 생겼는데 여기서 키치라는 말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키치 예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저자는 고급 예술, 통속 예술, 키치로 예술을 분류한다. 고급 예술은 진지한 감상을 요구하는 예술, 통속 예술은 보다 편하게 감상자에게 위안을 주고자 하는 예술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리고 키치적 예술은 통속적이면서 고급적인 것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예술을 말한다. 세 예술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거리’개념을 이용한다. 순수 예술이 대상과 감상자에 거리를 설정하고 객관적으로 대상 자체를 응시하게 하는 것이라면 통속 예술은 대상과 감상자를 동일시하려 한다. 그러나 키치는 순수 예술처럼 감상자와 대상의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상 자체의 객관적 감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멀어져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으로 전환하게 한다는 것이 다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이차적 눈물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명화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감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명화를 보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이 키치라는 것이다. 이렇기에 키치는 소비와 관련이 되어 있다. 즉, 상품의 효용, 가치를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 외적인 이미지에 끌려 소비하는 오늘의 성향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키치는 19세기에 등장했을까? 그것은 외부 세계의 실재에 대한 믿음이 이 당시부터 사라졌다는 데 있다. 신이 죽고 난 후의 좌절 절망감이 삶을 힘들게 했을 때 이것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키치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응시보다 거짓된 허상, 위안을 선택하면서 키치가 범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산업화로 인해 오히려 인간이 여유를 잃어버린 환경도 무시할 수 없다.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아니라 전체 공정의 부품화된 환경의 삭막함이 진지한 사고보다는 편하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예술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이다. 2장에는 다다이즘, 기하학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와 기능 주의 등 키 치를 넘어서려 했던 시도를 제시하고 3장에는 포스트 모더니즘, 메타픽션 등 현대의 여러 예술 분야에서 키 치를 해체한 결과를 제시한다. 그리고 끝으로 현대 예술을 철학적으로 돌아보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 한다.

그런데 나는 저자의 기치에 대한 정의에는 수긍하면서도 그 서술에는 다소 반감을 느낀다. 일단 저자는 기치적인 것을 구분하는 요건으로 작품과 감상자의 거리를 최 우선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 모더니즘, 메타 픽션처럼 감상자와 거리를 설정하는 예술을 최고로 칭송한 듯 싶다. 그런데 그러면서 노골적으로 이전의 예술들 전체를 키치로 몰아붙이는 듯한 태도는 수긍하기 어렵다. 작품이 감상자를 가두는 듯한 것에 반감을 느낀 모양인데 그래도 이런 태도는 그 자체가 키치적인 것이 아닌지. 또한 키치라는 것은 어찌 보면 감상자의 태도, 취향의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그것을 예술 창조로 연관 시키는 것도 무리다. 키치적인 감상 태도를 가능하지 않게 하지 위해 새로운 방식의 창작이 필요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 전의 작품들이 키치적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논리적 오류다.

한편 예술을 통해 향수를 느끼고 다른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면 그것이 진정한 예술 감상은 아닐지 몰라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감상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잠깐 언급했듯이 키치적 감상이 결국엔 반복된 학습 효과로 진지한 감상으로 이끄는 것처럼 모든 것은 키치적인 것에서 시작하지 않던가? 그러나 저자의 서술을 보면 키치적 감상은 죄악에 거의 가깝다. 창조는 물론이다. 다소 욕설에 가까운 감정적인 서술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이해하긴 한다.) 차라리 나는 키치적 감상자가 되련다.

 

저자는 곳곳에 철학사의 흐름을 인용한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실존주의 생철학으로 귀결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9세기 키치의 탄생이 그 무렵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 철학에 많은 애착을 저자가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면 그 또한 키치가 아닐까?) 그 실존주의적인 관점에서 모든 예술을 보면서 키치에 대한 비관적 사고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지. 또한 저자는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을 관련 지어 언급하곤 하는데 이것은 얼마 전에 읽은 <불확정성>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었듯이 직접 연관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부분을 가져가 썼다는 느낌이다.아니면 이해를 잘못 했던가.  어려운 이론을 가져다 거리 두기 독서를 유도하려 한 것일까? 적어도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려면 조금은 다르게 서술하면 어땠을까? 그러면 의도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아무튼 키치에 대한 키치적 글 쓰기라는 느낌이 든다. 그냥 1장 정도로 끝났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므로 이 책을 표지에 나와 있듯이 2007년 KBS의 ‘책을 말하다’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소 감정적으로 후기를 썼다. 거리를 두지 못하고..이것이 내가 저자를 잘 못 이해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현재 내 생각은 저자가 나를 그리 유도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거리를 두었어야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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