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해링의 그림이나 조각들에 나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다만 그의 그림을 보면서 팬시 캐릭터 같은 단순함 뒤에 생각보다 무거운 주제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의 일기가 번역되어 나오자 관심이 생겼다.
이 책은 키스 해링이 유명해지기 전, 아직 미술 전반과 자신의 나아갈 길을 고민하던 때부터 시작되어 AIDS로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까지의 일기를 담고 있다. 약 13년간의 일기인데 그것도 중간에 쓰지 않은 기간도 많다. 특히 유명해진 이후에는 바쁜 일정 때문인지 공백이 더 많다. 그래도 이 책은 키스 해링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해하게 한다. 그가 이 일기가 후에 책으로 출판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솔직한 자기 고백들이 그가 늘 대중과 소통하면서도 미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했고,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앤디 워홀을 비롯한 여러 선배, 동료 미술가들의 작품을 사랑했고, 아이를 사랑했음을 드러낸다. 그 가운데 1978년 10월 14일의 일기-이 일기가 그 해의 첫 일기였다-는 그의 미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재즈보다는 록, 힙합-그레이트풀 데드, 프린스, MC 해머, 비스트 보이즈-을 더 좋아했지만 그는 이 일기에서 같아 보이는 것도 매번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작품은 순간의 기록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유지하며 작품 활동을 한 것 같다.
한편 이 일기를 읽다 보면 20대에 유명해져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작품 활동을 하고 그 공간을 즐겼던 키스 해링의 삶이 부럽게 느껴진다. 어찌 보면 그는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그냥 자신의 작품이 알려지고 그래서 유명한 사람과 어깨를 같이하며 세계 곳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그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20대의 젊은이들이 매일 밤 클럽을 전전하는 것처럼 그는 파리-뉴욕-도쿄-런던-바르셀로나 등을 돌며 놀 듯이 작품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언제 그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는지는 나오지 않아 아쉽다. 바빴는지 그 사이의 일기는 없고 몇 년 후 어느새 유명해진 일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명해진 이후의 일기는 키스 해링의 삶 외에 80년대 유럽과 미국의 미술계를 어렴풋이 상상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