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콜트레인 : 내성적 연주자의 음악 여정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책상 앞에는 작은 사진틀 하나가 세워져 있다. 반짝 빛나는 은색 틀이 모던한 감각을 뽐내는 그 사진틀엔 존 콜트레인 사진이 담겨 있다. 친구가 준 사진틀을 그냥 두기 뭐해서 마침 가지고 있던 재즈 다이어리에서 오려 넣은 사진이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이사할 때도 나는 이 사진을 챙겼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존 콜트레인이 개인적으로 잘 아는 지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나는 존 콜트레인을 통해 재즈를 알았다. 물론 이전에 몇몇 재즈 곡들을 듣긴 했지만 존 콜트레인의 <Soultrane> 앨범을 듣고 나서야 재즈의 매력은 어떤 것이고 또 어떻게 재즈가 작동하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다이어리를 장식한 많은 재즈 명인들 사진 가운데 존 콜트레인의 사진을 선택했고 그 뒤로 지금까지 재즈 감상자로서의 내 삶을 대표하는 휘장(徽章)처럼 책상에 두고 있지 않나 싶다.
사진은 여러 재즈 연주자들의 사진을 찍었던 윌리엄 클랙스턴이 1960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찍은 것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존 콜트레인을 그곳으로 데리고 간 것인지 아니면 당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존 콜트레인이 참여한 재즈 관련 행사가 있었기에 그 기회를 틈타 사진을 찍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사진의 오른쪽 3분의 2는 두터운 붓의 터치를 강조한 비구상 회화 한 점의 일부가 차지하고 있고 그림의 경계선 즈음에 스트라이프 양복을 입은 존 콜트레인이 자신의 오른쪽을 응시하며 서 있다.[1] 전체적인 사진의 구성으로 보아 사진은 윌리엄 클랙스턴의 의도적 설정 하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존 콜트레인은 촬영자의 의도에 백 퍼센트 충실하지 못한 것 같다. 1960년이면 경력으로 보아 사진 촬영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 수도 있으련만 어쩐지 그의 시선은 강렬하긴 하지만 왠지 경직되어 있다. 하긴 존 콜트레인은 첫 앨범인 <Coltrane>(1957)을 제외하고는 카메라, 그러니까 그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고 찍은 사진을 앨범 표지로 사용한 적이 없다. 눈을 감고 색소폰을 연주하거나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사진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연주자들과 단체 사진을 찍은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Again!>(1966) 에서도 그는 정면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보다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 분위기가 더 좋긴 하다. 존 콜트레인 또한 마찬가지로 다른 곳을 향하는 그의 시선은 무척이나 사색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다른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 나머지 관찰자의 시선을 잊어버린 표정![2]
실제 존 콜트레인의 성격은 상당히 내성적이고 자기 관조적이었다. 또 그만큼 상처를 잘 받는 여린 연주자이기도 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를 비롯한 많은 연주자들은 그를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여러 인터뷰를 통해 소개하곤 했다. 어느 정도 그가 내성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그를 부단한 연습으로 이끌었음은 분명하다. 언제 어디서나 그는 시간이 허락되면 색소폰을 불었다. 아니 즐겼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지금까지 많은 연주자들이 따르고 도달하고 싶어하는 연주자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존 콜트레인이 재즈계에서 주목 받게 된 것은 29세였던 1955년 마일스 데이비스 그룹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는 마약 중독으로 인한 공백기를 마치고 의욕적으로 밴드를 결성하여 새로운 시작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가 원래 마음에 두었던 색소폰 연주자는 소니 롤린스였다. 그러나 소니 롤린스가 사정상 함께 하지 못하게 되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나 그 역시 평소 연주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존 콜트레인을 부르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존 콜트레인은 디지 길레스피, 자니 하지스 등 유명한 선배 연주자의 밴드에서 연주를 해왔지만 그렇게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 합류해 마약 중독으로 해고당하기 전까지 약 3년을 활동하면서 자신의 잠재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마약에 중독되지 않았더라면, 아니 최소한 마약 중독으로 인해 연주 시간에 늦거나 무대에서 멍하니 서있지만 않았더라면 마일스 데이비스 그룹에서의 활동은 조금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늘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연주자를 누가 싫어할 것인가? 그렇다면 재즈 역사는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되었을까?
마일스 데이비스가 존 콜트레인에 만족했던 것은 역시 존 콜트레인의 내성적인 면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즉, 그가 존 콜트레인의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면 연주 실력 자체보다 자신의 연주와 잘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3] 그리고 그 어울림은 유비(類比)가 아닌 대조(對照)를 의미한다. 실제 1956년의 마라톤 세션 4부작을 비롯하여 <The New Miles Davis Quintet>, <Round About Midnight>같은 존 콜트레인이 참여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많은 앨범들-명반이라 불리는-을 들어보면 가녀린 톤에도 불구하고 늘 자기만의 영역을 설정하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과 그 뒤에서 조심스레 자신을 드러내는 존 콜트레인의 색소폰이 일종의 명암을 이루며 공간적 깊이감을 생산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마약 중독으로 인해 1957년 4월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서 두 번째로 해고 된 이후 델로니어스 몽크와 함께 한 연주에서도 느낄 수 있다. 침묵, 여백이 주는 긴장, 불연속이 주는 독특한 내적 리듬감을 즐겼던 델로니어스 몽크의 피아노에 존 콜트레인은 공간적 균열을 메우고 시간을 지속 시키려는 듯한 연주로 대응한다.
나는 마일스 데이비스나 델로니어스 몽크 밴드에서 리더와 대조적 관계를 이루었던 그의 연주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의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아닌 두 밴드리더의 의도였을 것이다. 즉, 마일스 데이비스와 델로니어스 몽크가 존 콜트레인의 장점, 매력을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밴드에 녹아내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두 리더와 함께 하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연습은 겉으로 보면 현란한 기교 중심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음악적 방법론의 모색이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그만의 방법론은 색소폰이라는 단선율 악기로서는 이루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은 연주의 근간을 이루는 코드를 구성하는 음들을 16분 음표 이상의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마치 하나의 색소폰 안에서 멜로디와 코드가 동시에 만들어지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입체적이고 건축적인 연주를 들을 때마다 나는 혹시 그가 기타나 피아노처럼 색소폰을 연주하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궁극적으로는 색소폰 하나로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성적으로 자신에게 집중하기를 좋아하는 그로서는 충분히 그럴만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 시간을 최대한 짧게 분절하고 이것을 하나의 좌표처럼 공간화시켜야 했으리라. 그럼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기에 그 건축물은 늘 위태롭게 흔들렸으리라. 그러면 그는 더 빠르게 마치 시지프스처럼 다시 코드 구성음들을 쌓아 올려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영원불멸의 집을 짓기란 불가능한 일. 어쩌면 그래서 후에 시간을 지속시키는 듯한 모달 재즈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나아가 음악을 통한 종교적 상승을 꿈꾸게 되었던 것인 지도 모른다.
재즈 평론가 이라 기틀러에 의해‘Sheets Of Sound’[4] 라 불리게 된 이 주법을 존 콜트레인은 마일스 데이비스, 델로니어스 몽크와 함께 하면서 완성했다. 그리고 자신의 초기 솔로 앨범을 통해 마음껏 분출했다. 그는 1957년부터 솔로 앨범을 녹음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연주, 혹은 리더로서의 능력에 대해 그다지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첫 두 장의 앨범 <Coltrane>-유일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을 표지로 사용한-과 <Blue Trane>을 리더 경험이 있는 연주자들과 함께 녹음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이후 쿼텟 앨범에서는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함께 했던 레드 갈란드 트리오의 지원을 받았는데 만약 마일스 데이비스처럼 존 콜트레인을 자유롭게 풀어준 레드 갈란드의 조력이 없었다면 <Soultrain>같은 앨범은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질식할 듯 수많은 음들을 동시해 토해내는 속주는 분명 앞으로 존 콜트레인을 정의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시간을 멈추고 공간을 메우려는 듯한 속주 반대편에서 흐르는 시간을 인식하고 침묵이 공간을 메울 수 있음을 인식한 듯한 느린 (발라드) 연주 또한 즐겼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앞으로 그의 대중적 매력으로 작용할 이 발라드 연주는 존 콜트레인의 내성적인 성격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특히 앨범 <Lush Life>에서 레드 갈란드의 지각을 계기로 색소폰-베이스-드럼의 트리오 편성으로 녹음한 ‘Like Someone In Love’는 그의 발라드 연주를 대표하는 서명(署名)이었다. 이 연주를 들으면 존 콜트레인은 기본적으로 발라드에 적합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러한 발라드 연주는 1963년의 삼부작 <Ballads>, <Duke Ellington & John Coltrane>, <John Coltrane & Johnny Hartman>에서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한편 존 콜트레인은 발라드 연주를 단순히 속주에 지칠 때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연주한 것 같지는 않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가 반짝이는 멜로디로 가득한 발라드 연주를 하면서 모달 재즈의 동기를 얻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그의 모달 재즈는 코드 전개의 극한에 이른 끝에 발견한 새로운 경지였다. 그러나 그가 과감하게 코드의 세계에서 모드의 세계로 넘어갈 결심을 한 것은 보다 자유롭게 멜로디를 이어 가고픈 욕구 때문이었다고 본다.
1959년 존 콜트레인은 프레스티지 레이블을 떠나 아틀란틱 레이블로 이적했다. 그리고 첫 앨범 <Giant Steps>를 녹음했다. 이 앨범은 존 콜트레인의 아틀란틱 레이블로의 이적만큼이나 그의 한 시기를 단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앨범에서 그는 앨범 <Blue Train>의 ‘Lazy Bird’, ‘Moment’s Notice’등에서 잠시 보여준 정교한 코드진행-보통 콜트레인 체인지라 불리는-을 ‘Giant Steps’, ‘Countdown’같은 자작곡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거의 박자마다 코드가 (대리코드로) 바뀐다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코드 진행은 마치 전체 곡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효과를 냈다. 이를 통해 존 콜트레인은 비밥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지점을 보여주었다. 실제 지금까지 많은 색소폰 연주자들은 이 앨범의 편곡과 솔로를 연주의 모범으로 삼고 있다.
한편 부단히 꿈틀대는 듯한 코드 진행은 그동안 존 콜트레인이 색소폰으로 혼자 표현하던 것을 일부분 피아노에 이양하면서 만들어진 것 같다. 이전까지 그의 ‘Sheets Of Sound’연주는 곡의 근간을 이루는 코드 음을 넘어 그 대리코드 음을 함께 사용하곤 했는데 그것을 피아노에 넘긴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을 충실히 따르고 이행해줄 연주자로 구성된 자신만의 밴드의 필요성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 그는 <Giant Steps>이후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기 위해 연주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스티브 쿤을 거쳐 맥코이 타이너로, 피트 라 로카와 빌리 히긴즈를 거쳐 엘빈 존스로, 레지 워크맨과 스티브 데이비스를 거쳐 지미 개리슨으로 구성된, 후에‘클래식 쿼텟’이라 불리게 될 쿼텟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세 연주자는 정말 존 콜트레인의 손발이자 분열된 자아처럼 존 콜트레인이 마음에 품은 음악을 완벽히 구현해주었다.
<Giant Steps>을 녹음할 무렵 존 콜트레인은 조금씩 코드 중심의 연주에서 모드 중심의 연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슷한 시기에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 잠시 참여하여 녹음한 <Kind Of Blue>에서부터 나타나는데 존 콜트레인이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모달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연주를 보다 긴 호흡으로 자유로이 펼치고픈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모달 재즈는 코드가 아닌 음들의 독특한 배열로 구성된 모드를 기반으로 한다. 그렇기에 코드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나 둘 정도의 코드로 곡을 구성할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1961년도 앨범 <My Favorite Things>의 타이틀 곡이다. 이 곡에서 맥코이 타이너의 피아노는 하나의 동일한 코드의 패턴적 반복을 지속한다. 이것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것과 달리 수많은 솔로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잠재성의 장(場) 역할을 했다. 또한 콜트레인 체인지로 대표되는 그의 복잡한 코드 진행을 중심으로 한 연주가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시간의 흐름에 따른 부단한 장소이동의 느낌을 주었다면 단순 패턴을 기반으로 한 모드 중심의 연주는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나아가 영원을 꿈꾸는 탈(脫)시간적인 느낌을 준다. 그래서 단순한 패턴의 반복으로부터 일종의 몽상 혹은 최면 효과가 발생한다. 여기서 존 콜트레인의 솔로 연주는 시간을 따라 흐르기보다 한 지점에서 분출되듯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이러한 연주 방식은 이후 음악적 관심이 이국적이고 정신적인 쪽으로 흘렀던 그의 아방가르드 재즈 시대의 기초가 된다.
자신은 미처 알지 못했을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했던 것일까? 후기 존 콜트레인은 영적이고 종교적인 면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종교적이라 함은 단순히 기독교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이슬람교, 힌두교, 유대교의 카발라 등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것을 음악에 투영했다. 그것의 대표적인 경우가 1964년에 녹음된 앨범 <A Love Supreme>이었다. 4부작으로 구성된 이 앨범을 통해 존 콜트레인은 신에 대한 자신의 경외심을 표현했다. 그런데 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직접 쓴 이 앨범의 라이너 노트를 보면 그는 이미 1957년 영적인 각성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앨범 이후 그는 <Om>[5](1965), <Ascension>같은 앨범을 통해 자신의 종교적 관심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나아가 <Sun Ship>(1965), <Cosmic Music>(1966), <Interstellar Space>(1967), <Stellar Regions>(1967) 등의 앨범을 통해 우주적인 성향으로 발전시켰다.
이 당시 존 콜트레인의 연주는 주로 단단하게 기저에 자리를 잡은 하나의 모드를 기반으로 분출하듯 상승에 상승을 거듭하는 것으로 이루어 졌다. 그래서 연주를 듣다 보면 현실을 초월해 다른 곳으로 넘어가고픈 그의 의지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현실 초월에 대한 욕망은 사후세계의 동경은 아니었다. 그 당시 그가 몸담고 있는 미국이라는 사회에서의 초월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당시 미국은 인종차별에 대한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의 민권 운동과 여러 시위 등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이에 대해 많은 재즈 연주자들은 음악을 비롯한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들의 지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존 콜트레인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KKK단이 저지른 알라바마의 버밍엄에 위치한 한 침례교회 폭탄 테러 사건에 대해 ‘Alabama’라는 곡을 작곡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위해 ‘Reverend King’같은 곡을 작곡하며 현실 참여적인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혼란스러운 현실에 대해 종교적인 명상으로 극복하려 했다. 다만 사람들이 성난 듯 분출하는 그의 자유로운 솔로 연주를 저항운동의 에너지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한편 다양한 종교를 아우르는 범우주적인 음악, 뜨거운 에너지가 폭발하듯 분출되는 연주를 펼치면서 그는 아프리카, 인도 등의 음악을 차용하고 편성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드럼 연주자를 동시에 기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국적이고-미국인의 관점에서-자유로운 존 콜트레인의 후기 음악은 종종 오넷 콜맨의 프리 재즈와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Ascension>처럼 프리 재즈의 명반으로 불리는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음에도 존 콜트레인은 자유로운 솔로 가운데에서도 앙상블의 호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운드로 프리 재즈와 일정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부단한 연습을 통해 연주적 자유를 획득했으며 코드나 모드의 기반에서 시공간을 아우르는 연주를 만들어 온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1967년 7월 17일 존 콜트레인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간암이 원인이었다. 나이만 두고 생각해도 이른 죽음이지만 그의 음악 인생만을 두고 보면 그의 사망은 요절에 가깝다. 1957년 5월 31일 첫 솔로 앨범 <Coltrane>을 녹음했으니 그의 음악 인생은 10년에 지나지 않는다. 더 멀리 1955년 마일스 데이비스의 부름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았을 때로 잡아도 약 13년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많은 일을 해냈다. 무엇보다도 10여 년의 시간 동안 그의 음악은 늘 새로운 방향을 향했고 넘치는 생명력으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른 사망에 아쉬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삶과 음악이 일치된 시기에 세상을 떠났기에 나쁘지 않은 마감이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로서는 음악적으로 여한이 없는 삶이 아니었을까?
존 콜트레인 대표 앨범 5선
Blue Train (Blue Note 1957)
시기 상으로는 <Coltrane>에 이은 두 번째에 해당하지만 본격적으로 솔로 연주자로서의 존 콜트레인을 알린 앨범이다. 그리고 그의 유일한 블루 노트 레이블에서의 앨범이기도 하다. 앨범에서 그는 그만큼이나 뛰어난 실력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던 연주자들과 함께 하며 리더로서의 부담을 덜어내려 했다. 연주 또한 블루스 형식을 따르는 타이틀 곡부터 하드 밥의 전형을 충실히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다섯 곡 가운데 네 곡을 작곡하고-이 곡들은 현재 모두 스탠더드 곡이 되었다- 그 중‘Moment’s Notice’, Lazy Bird’등의 곡에서 이후 <Giant Steps>에서 구체화될 콜트레인 체인지라 불리는 정교한 코드 진행의 단초를 드러내면서 앞으로 그가 단순한 연주자를 넘는 인물로 성장할 것을 예고하기도 했다.
Giant Steps (Atlantic 1959)
이 앨범은 하드 밥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지점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곡으로만 채운 앨범이기도 하다. 당시 존 콜트레인은 ‘Sheets Of Sound’라 불리는 특유의 빠른 속주로 논쟁의 대상인 동시에 인기 있는 연주자로 성장해 있었다. 그런 중에 발표한 이 앨범에서 그는 보다 촘촘하고 정교한 코드 체계를 선보이며 코드 중심 연주로써는 더 이상 보여줄 부분이 없음을 드러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Tune Up’의 코드 패턴을 자기 식대로 바꾼 ‘Countdown’이 대표적이다. 한편 앨범 타이틀 곡을 비롯하여 ‘Mr. P.C’ 그리고 아내를 위해 만든 ‘Naima’같은 곡은 현재 스탠더드 곡이 되었다. 존 콜트레인의 연주를 공부하려는 연주자라면 꼭 들어야 하는 앨범이다.
My Favorite Things (Atlantic 1960)
1959년 존 콜트레인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 앨범에 참여하며 모달 재즈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 앨범 타이틀 곡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이 곡에서 그는 맥코이 타이너가 펼치는 단 두 개의 코드로 이루어진 강박적인 패턴 연주위로 보다 긴 호흡으로 이루어진 솔로를 열정적으로 펼친다. 그래서 이 앨범은 이후 펼쳐질 존 콜트레인의 아방가르드 시대를 예고한 앨범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그 외에 시드니 베쉐 이후 잘 사용되지 않았던 소프라노 색소폰을 연주한 앨범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한편 특이하게도 전반적으로 듣기 쉬운 사운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주제곡이었던 ‘My Favorite Things’의 인기 때문인지 5만장 이상 판매되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Ballads (impulse! 1962)
존 콜트레인은 수많은 음들을 분출하듯 쏟아내는 연주를 즐겼지만 그의 발라드 연주 또한 상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 앨범은 ‘Ballads’가 아닌 ‘The Ballads’라 해도 좋을 정도로 발라드 연주의 모범을 보여준다. 이 앨범을 녹음할 무렵 그는 진보적인 연주에 대한 열광만큼이나 재즈적이지 않다는 식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임펄스 레이블의 제작자 밥 틸은 진보적인 앨범보다 <Kind Of Blue>같은 앨범을 그에게서 기대했다. 그래서 그는 발라드 연주가 중심이 된 앨범 석 장을 녹음했는데 그 가운데 한 장이 이 앨범이다. 이 앨범에서 그는 속도와 상승에 대한 열정을 제어하고 여리고 부드러운 톤으로 스탠더드 곡들을 모처럼 낭만적으로 연주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본적으로 그가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깨닫게 해준다.
A Love Supreme (Impulse! 1964)
후기의 존 콜트레인은 영적이고 종교적인 면에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삶을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욕구 또한 강했다. 그 결과 신에 대한 자신의 경외를 음악으로 표현하기를 시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앨범이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이 앨범은 순수한 영혼의 추구, 종교적 각성을 통해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존 콜트레인의 바람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한 존 콜트레인의 솔로는 서사적이고 명상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마지막 곡에서는 내지에 존 콜트레인이 직접 쓴 종교적 헌사를 색소폰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앨범은 존 콜트레인의 영적/종교적 관심의 절정을 보여준 앨범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관심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의 시작을 알린 앨범이었다. 이후 그는 우주로까지 확장되는 초월적인 사운드를 추구하게 된다.
[1] 이 사진이 궁금한 독자는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거나 존 콜트레인의 1958년도 녹음을 하나로 묶어 론힐 레이블에서 지난 2004년에 발매한 <The Complete Mainstream 1958 Sessions> 앨범 표지를 찾아보기 바란다. 전체적으로 붉은색 필터를 사용하고 수평 뒤집기를 통해 좌우가 역전되어 있지만 내가 보고 있는 바로 그 사진을 표지로 사용했다.
[2] 그의 내성적 분위기는 그와 깊은 관련을 맺었던 마일스 데이비스와 비교해 볼 때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마일스 데이비스 또한 정면을 응시하고 찍은 사진을 표지로 사용한 앨범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정면을 바라본 사진들 대부분은 확고한 자신감을 느끼게 한다.‘재즈의 리더는 나다! 나를 따르라!’는 식의 자신감 말이다. 그리고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지 않았을 때도 그의 모습은 야전 사령관-선글라스를 끼었을 때-과도 같은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3] 나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재즈의 리더로 인정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인이건 이미 알려진 스타 연주자건 적재적소에 필요한 연주자를 배치하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
[4] 음들이 동시에 겹쳐서 들린다는 뜻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 같은데 이를 우리 말로 정확히 옮기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다. 보통 국내에서는 직역하여‘소리 이불’로 번역하곤 하는데 이 번역은 ‘이불’이라는 단어로 인해 여러 음들이 겹쳐져 하나의 두터운 층을 형성한다는 느낌을 주기보다 감상자를 포근하게 감싸는 부드러운 소리로 이해될 위험이 더 큰 것 같다. 실제 존 콜트레인의 따스하고 달콤한 발라드 연주를 생각하면‘소리 이불’는 존 콜트레인의 정서적 측면을 대변하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5] ‘Om’은 무한 혹은 전 우주를 의미하는 힌두교의 용어이다.
언젠가 러브수프림의 레졸루션을 듣고 생활의 일정부분이 툭툭 부서져 떨어져 나간 기억이 나네요. 그곳에 다시 채워진 조각들은 이후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변화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콜트레인의 팬으로서 아름다운 글 잘 읽고 갑니다.
감동을 받으셨군요. 저는 존 콜트레인을 통해 재즈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특별하죠. 고맙습니다.ㅎ
멋진글입니다.
감사합니다. 댓글을 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