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가 1985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얼바인 캠퍼스에서 가진 3회의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음악을 주제로 한 강연에 에드워드 사이드가 초빙되었다는 것이 다소 기이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주요 논점은 보통 우리가 음악은 순수하다, 음악은 정신적 영역의 산물이다라고 하면서 음악, 특히 클래식을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동떨어진 공간에 위치시키고 그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을 거부하고 음악을 사회적인 층위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물론 에드워드 사이드 역시 음악의 개인적 측면을 인정한다. 그러나 음악이 사적인 만큼 공적인 것임을 인식하기를 요구한다. 즉, 음악은 문화, 사회적 맥락과 복잡한 관련을 맺고 있는 만큼 개인과 음악, 그리고 사회와 음악의 상호작용 모두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새로운 음악에 대한 관점, 적어도 순수의 영역에 놓고 음악을 바라보는 현 음악 평과는 다른 폭 넓은 관점을 획득할 것이라 말한다.
음악이 사회적이라고 해서 그가 어떤 정치적 색이 강한 민중음악 저항음악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가 말하는 사회적이라 함은 단지 사회의 영향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바그너의 음악이 그러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제목에는 살짝 거부감이 있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은 <Musical Elaborations>다. 번역자의 해석에 의하면 ‘음악적 세련’정도로 볼 수 있겠다. 즉, 음악은 개인경험과 사회경험의 교차를 통해 세련된 방향으로 발전되어 간다는 것이다. 뭐 내용상으로 보면 ‘음악은 사회적이다’라고 제목을 붙이는 것이 나름 이해가 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구성을 보면 꼭 그럴 수만은 없겠다 생각된다. 이 책의 제목에 직접 어울리는 내용은 바그너를 통해 사회와의 상호 관련성을 다룬 2장 ‘음악의 침범적인 요소’뿐이다. 다른 부분은 ‘음악은 사회적이다’라는 것과 관련 지어 생각하면 다소 혼란스럽다. 예를 들어 첫 장인 ‘극단적인 사건으로서의 연주’는 과거 작곡가 중심의 세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연주자, 특히 콘서트 순간에 모든 것을 발휘하는 연주자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사회적 흐름에 따라 이리 바뀌었다고 말하면 할말이 없지만 그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렇게 연주자 중심으로 바뀌면서 음악이 세련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콘서트 활동을 일찌감치 접고 오로지 스튜디오 녹음에 전념했던 글렌 굴드를 중요한 예로 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3장 ‘선율, 고독, 긍정’은 더하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그의 명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드러낸 음악관에서 출발하는 이 장은 음악의 개인적인 경험의 중요성을 말한다. 즉, 같은 음악이지만 듣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음을 보다 더 강조한다. ‘음악은 사회적이다’라는 것은 그러한 경험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에서 따질 수 있겠지만 역시 이것이 주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결국 이 책은 ‘음악적 세련’ 혹은 ‘세련된 음악’ 아니면 ‘음악은 어떻게 세련화되었는가’정도가 적합한 제목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러면 책은 덜 팔리겠지만.
한편 그는 자신을 ‘자격을 갖춘 아마추어’라고 말하고 잇는데 이것은 겸손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 음악 감상자들이 얼마나 가벼워졌는가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과거의 감상자들은 직접 음악을 연주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보다 깊은 감상이 가능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연주 중심의 음악을 다룬 첫 장을 읽다 보면 재즈를 생각하게 된다. 이미 재즈는 연주자 중심으로 발전을 해왔지 않던가? 그리고 재즈야 말로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음악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