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중남미 문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설가라는 사실에 이끌려 구입했다. 할인으로 책 가격이 아주 저렴하기도 했고.
작은 판형에 100여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내용-출판사는 중편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단편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의 이 소설은 추리 소설적인 분위기로 시작하여 그 긴장을 환상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켜 애정 소설적인 분위기로 마감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읽기가 가능하리라 본다.
여러 가지 화두 가운데서 제일 크게 부각되는 것은 책 수집가-독서 애호가와는 조금은 다른 차원이다-들의 내면을 통한 소유의 허망함이다. 소설 속 브라우어를 비롯한 책 수집가들이 고서를 비롯하여 고가의 책들을 수집하고 후에는 책이라는 사물에 압도당해 인간적인 삶을 포기 당하는 내용은 대상이 문화적인 것일 지라도 물신화가 되면 인간을 파괴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음반에 집착하는 나의 현재를 생각했다. 그렇게 크게 음반 욕심을 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실제로 그렇다 난 소장보다 듣기를 더 좋아한다-갈수록 저장 공간 부족으로 고민하게 되는 내 현실을 생각하면 이 부분은 하나의 경고로 다가온다.
한편 대상화 되었지만 책은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브라우어가 파멸로 이끌리게 된 것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벽히 정리된 서지목록을 만들려 했다가 그것이 화재로 불타면서부터다. 즉, 책 자체가 타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만 여권의 책들을 자기 식대로 정리하고 그것을 기록한 목록은 그에게 책에 대한 기억, 삶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좌절은 기억의 소멸을 의미한다. 또 그렇기에 책으로 집을 지을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책을 벽돌 삼아 시멘트로 고정을 시켜 집을 만들고 그 안에 삶으로써 새로이 기억을 복원하려 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견고하지 못한 기억의 집은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리고, 망각을 요구하는 기억까지 등장하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망각을 요구하는 기억이 사랑의 기억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집이 무너질 위험을 감수하고 책 벽돌 가운데에 구멍을 낼 결심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어쨌건 이것이 소설을 슬픈 사랑 이야기로 만듦은 분명하다.
이 소설에는 언급했다시피 책 수집가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텍스트의 통로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흥미로웠다. 내용과 상관 없이 단어들이 사이의 여백들이 행마다 이어지면서 만들어 내는 통로가 새로운 미적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암호 해독에 가까운 독서를 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튼 흥미로웠다.
이 책의 원 제목은 ‘La Casa De Papel’이다. 우리 말로 다시 옮기면 ‘종이 집’ 혹은 ‘종이로 만든 집’ 정도가 된다. 사실 이 제목을 사용하면 중간에 추리소설적인 분위기가 덜해질 수 있다. 그러나 내용상 이 제목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어 제목 ‘위험한 책’은 브라우어가 책에 소유되어 파멸에 이르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실 작가는 내용이 사람의 삶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책이 아니라 그 외적인 측면에서의 위험을 지칭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서가에서 백과사전이 머리에 떨어져 사망한다던가, 길에서 책을 읽다가 교통사고가 난다던가 하는 식의 위험 말이다.
한편 책에 관한 내용이다 보니 다양한 저자와 책들이 곳곳에서 언급되곤 한다. 하나씩 다 읽어 보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작가가 나를 브라우어로 만든다. 특히 이야기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셉 콘라드의 <The Shadow Line>,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은 꼭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