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미국 현대 문학은 물론 세계 문학의 명작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스콧 핏제랄드의 이 소설을 그 동안 나는 읽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그것은 제목 가운데 ‘위대한’이라는 형용사 때문이었다. 그 어감이 개츠비라는 한 인간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장편 서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레 짐작으로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이번에 읽은 것도 그냥 한번 확인이나 하자는 마음으로였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은 달랐다. 개츠비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어두운 방법으로 돈을 모은 졸부-그러나 부정적인 이미지는 아니다-였다. 그리고 힘든 시절 경제적인 문제로 포기해야 했던 여인을 잊지 못하는 낭만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를 이야기하며 ‘위대한’이라는 한정을 사용한 것은 반어적인 의미일 수도 있지만 놀랄 정도로 자신의 사랑을 우직하게 지키려는 그의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소설은 서사극보다는 일종의 치정극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무엇 때문에 그리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그것은 소설의 여러 인물의 성격, 과거부터 그들 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재즈 시대를 넘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실제 소설 속의 어지러운 파티는 미국의 소비사회에 대한 풍자처럼 읽힐 수 있으며 개츠비의 과거는 미국의 과거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다양한 해석들이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풍요를 겪은 이후 다시 혼돈으로 바스러져가는 미국 사회의 위태로움에 대한 묘사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과거를 되돌릴 수 있다고 믿으며 지난 사랑을 현실로 만들려는 개츠비의 무모한 노력이라 생각한다. 스콧 핏제랄드가 대중적인 소설을 주로 썼음을 생각하면 애초 그의 의도는 이 그릇된 애정사에 관한 것이었으리라. 그것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서 보다 넓은 의미를 포용하게 된 것은 아닐까? 물론 여기서도 그가 차지하려 했던 사랑을 하나의 미국적 이상으로 보고 그것의 몰락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해몽일 뿐 나는 스콧 핏제랄드의 꿈은 애정사였다고 본다.
이 책을 다 읽을 무렵 소설가 김영하의 번역으로 이 소설이 새로 출판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어 살펴보니 그 동안 이 소설이 여러 차례 번역 되었지만 원본이 워낙 애매한 부분이 많아서인지 만족스러운 번역이 거의 없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내가 읽은 이 책이 제일 잘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지 김영하가 작가적 감성을 반영해 새로 번역한 모양이다. 사실 내가 읽은 이 책에서도 어딘가 모호한 부분이 많다. 그것이 번역의 문제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약이 발생하는 곳부터 내용을 모호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종종 보인다. 그래서 김영하의 번역이 궁금하기도 하다. 비교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