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유령들: 금지된 욕망의 봉인을 푸는 심리 르포르타주 – 대니얼 버그너 (최호영 역, 미래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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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읽게 된 책. 대충 소설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서 집었는데 소설식 서술이 등장하는 르포르타쥬였다. 그런데 그 주제가 性이다.

이 책은 르포르타쥬에 정평한 저자가 다양한 이상성욕자들과 그 세계를 취재하여 정리한 것이다. 크게 네 장으로 네 명의 주요인물을 등장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그들의 세계와 이들을 치료하려는 의사들의 세계를 담담한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여성의 발만 보면 성욕을 느끼는 가정적인 사업가, 유명 패션디자이너로 가학성애를 즐기는 여성, 어린 의붓딸에게 성욕을 느껴 추행하여 감시와 치료를 받고 있는 IT 기술자이자 밴드 리더, 사지절단성애를 가진 광고업자이다. 이들을 만나면서 그는 페티시즘, 사도마조히즘, 소아성애, 사지절단성애에 관한 깊이 있는 탐방을 해나간다.

그런데 아무리 그가 담담한 관찰자 역할을 유지했다고 해도 그 이면에는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하나의 차이로 존중하려는 의지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과거에는 오럴 섹스가 변태스러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닌 것처럼 이 이상성애도 결국은 관용의 문제가 아니냐는 식의 사고가 깔려 있다. 패티시 환자의 고백, 그러니까 정상 대접을 받으면 무척 좋을 것 같다는 식의 고백이 이를 말한다. 사실 정상과 비정상은 푸코가 이야기했듯이 권력과 연관된 사회적인 측면이 강하다. 포용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여백이 있느냐 아니냐에 달렸다. 전쟁 중에 주적에 승리하기 위해 다른 적대국과 손잡을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인 안정성의 측면에서 포용의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저자의 아래 생각을 적극 지지한다. 하지만 소아성애는 좀 아니지 않나? 저자도 여기엔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긴 한다.

한편 이들을 취재하면서 그는 정신과 심리과 의사들의 다양한 노력도 소개한다. 의사들은 이런 이상성욕을 학습 이전에 선천적인 것으로 보거나 어릴 적 학습-트라우마 같은-에 의한 것으로 본다. 어쨌건 의사들은 이들을 환자로 규정하고 상담 후 약물 치료를 주로 하곤 한다. 그 치료는 단순히 성욕 전체를 억제시키는 것부터 다시 새로운 성욕-정상적이라 불리는-을 학습하는 것까지 다양한 의도로 나뉜다. 하지만 모두 확실하게 정리되는 효과를 얻지 못한 것 같다.

한편 독자들은 이러한 큰 주제보다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이상성애에 관심이 더 많을 것 같다. 이 책이 인기를 얻었다면 아마도 이러한 관음증적인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실제 저자가 들려주는 다양한 이상성애는 때로는 역겹기도 하고 때로는 모르는 부분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면서 책을 끝까지 읽게 한다. 혹 독자 중에 몰랐던 이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는 사람이 있을까?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일수록 더 흥미를 가질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나로서는 ‘욕망의 유령들’이라는 한국어 판의 제목이 불만스럽다. 책의 원제 ‘The Other Side Of Desire’처럼 ‘욕망의 다른 편’ 정도로 했다면 어땠을까? 책이 팔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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