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넷 콜맨(Ornette Coleman : 1930.03.09 ~ 2015.06.11)

 

자유로운 형식주의자

지난 6월 11일 오넷 콜맨이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 마비. 1930년 생으로 우리나이 86세이니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었던 일이리라. 다만 2009년 그의 집에서 조던 맥린(트럼펫), 아미르 지브(드럼), 아담 홀즈만(피아노) 등과 함께 한 연주를 담은 앨범 <New Vocabulary>가 지난 해 그의 허락 없이 발매되었고 이에 대한 문제가 5월말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았기에 혹시나 이것이 그의 사망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그의 사망 소식에 재즈사의 가장 긴 장이 마감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프리 재즈의 창시자로 재즈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의 사조를 제시하고 발전시키는 것 이상의 큰 영향을 그가 이 시대에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프리 재즈는 음악적 형식보다는 스스로 형식을 만드는 자유로운 태도 혹은 정신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즉, 재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연주자들에게 심어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분명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루이 암스트롱이 창법과 즉흥 연주 모두에서 재즈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던 것, 찰리 파커가 연주자의 즉흥 연주를 제일 우위에 둔 것, 마일스 데이비스가 시기에 따라 적절한 방향으로 재즈의 흐름을 이끌었던 것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실제 프리 재즈 이후 연주자들은 미국을 떠나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서 새로운 자양분을 획득하게 되었고 기존의 형식적인 부분을 와해시키려는 듯한 극단적 즉흥연주를 펼치거나 반대로 모든 부분까지 세밀히 고려한 작곡 중심의 연주를 펼치는 등 상상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펼쳐졌다.

물론 그는 1958년 <Something Else!!!!>를 시작으로 1960년 <Free Jazz>에 이르는 동안 발생한 프리 재즈에 대한 환호가 후에 그리도 큰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연주자의 순간적 직관에만 의지해 휘발성 강한 즉흥 연주를 고집하는 형식파괴주의자가 아니었다. 1960년에 두 개의 쿼텟이 규약 없는 혼돈 가득한 즉흥 연주로 감상자로 하여금 음악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 앨범 <Free Jazz>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자유로운 연주만큼이나 형식적인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Lonely Woman’, ‘Turnaround’, ‘When Will the Blues Leave?’, ‘The Blessing’ 등 여러 곡을 작곡하고, 평생에 걸쳐 새로운 어법을 발굴하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따라서 그는 형식 파괴자가 아니라 새로운 형식을 만들려고 했던 형식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그는 재즈의 과거를 부정하지도 않았으며 우연히 보물을 발견하듯 프리 재즈를 만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연주자로서의 그의 초기 시절을 보면 기존의 음악 안에 편입되려는 의지가 더 강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독학으로 익힌 불완전한 연주력이 이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 같다. 1949년 실라스 그린 프롬 뉴 올리언즈라는 리듬앤 블루스를 주로 연주하는 유랑 악단의 멤버로 루이지아나의 바톤 루즈에 있는 한 댄스 홀에서 연주를 하다가 밴드와 섞이지 않으며 코드의 사이사이를 비껴 나가는 듯한 그의 (이상한) 솔로 연주에 불편함을 느낀 관객들로부터 구타를 당한 사건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런 상황에서도 재즈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만의 음악, 그러면서도 세상을 놀라게 만드는 파격적인 재즈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1930년 3월 9일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난 그는 독학으로 색소폰 연주법을 익혔다. 그에 따르면 그의 독학은 색소폰을 가지고 노는 것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정해진 주법이 있고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냥 소리가 나는 대로 즐겁게 연주하는 것이 그의 공부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색소폰과 악보 사이에 조성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악보상에 나타나 있는 ‘도’를 알토 색소폰으로 연주하면 실제 음은 ‘미 플랫’이다. 그래서 색소폰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고 늘 조성을 그 차이만큼 바꾸어 연주해야 한다. 즉, 악보상의 ‘도’를 연주하려면 악기로는 ‘라’를 연주해야 한다.) 어쩌면 이 오해가 기존의 재즈와 그 사이에 긴장을 만들고 급기야 프리 재즈로 나아가게 되는 단초가 되었는지 모른다.

바톤 루즈 사건으로 밴드에서 해고된 그는 LA로 건너가 R&B 보컬의 반주자로 활동하는 등 음악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악보보다는 귀에 의지해 연주를 했기에 기존 비밥의 코드 진행에서 조금씩 비껴나가는 그의 연주는 이 곳에서도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 당대의 연주자들은 그가 잘못된 음으로 어울리지 않은 잘못된 연주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가 색소폰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정해진 주법, 비밥의 어법을 있는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귀에 들리는 바대로, 그가 느끼는 대로 연주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 다만 이런 그를 이해하고 그와 음악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 연주자를 만나기 어려웠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모든 연주자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폴 블레이(피아노), 바비 브래드포드, 돈 체리(트럼펫, 찰리 헤이든(베이스), 에드 블랙웰, 빌리 히긴즈(드럼) 등 새로운 열정으로 충만한 젊은 연주자들이 그와 어울렸다. 그렇게 해서 1958년 첫 앨범 <Something Else!!!!>를 녹음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첫 앨범은 그리 파격적이지 않았다. 미묘한 긴장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와 밴드의 연주는 비밥과 블루스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1959년에 선보인 석장의 앨범 <Tomorrow Is the Question!>, <The Shape of Jazz to Come>, <Change of the Century>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타이틀을 통해 내일이 문제고 도래할 재즈는 이런 것이며 그래서 새로운 세기가 올 것이라고 했지만 그의 음악은 아주 파격적이지 않았다. 그의 곡들은 확연하게 빛나는 멜로디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솔로 연주 또한 위태롭지만 비밥에 의존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색소폰과 돈 체리의 트럼펫은 종종 같은 방향의 연주로 곡 전체에 안정감을 부여하곤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 앨범을 전형적인 비밥 앨범으로 볼 수는 없었다. 곳곳에서 드러나는 생경한 구조와 이를 바탕으로 한 솔로가 앨범을 다르게 생각하게 했다.

진정한 프리 재즈의 혁명은 1960년에 발생했다. 이 해에 색소폰 연주자는 이전 앨범들보다 훨씬 더 화성적으로 자유로운 <This Is Our Music>을 통해 선보인 후 야심 가득한 음악적 시도를 했다. 그것은 색소폰-트럼펫-베이스-드럼으로 구성된 피아노 없는 두 개의 쿼텟이 즉흥 연주를 펼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각각의 쿼텟은 그 자체로 서로 어울리는 부분이 있기도 했지만 다른 쿼텟 연주와 섞이면서 파격적인 혼돈의 상태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기존의 재즈와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무엇이었으며 조화를 바탕으로 한 음악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Free Jazz>에 이르기까지에는 돈 체리, 찰리 헤이든 등 함께 한 연주자의 협력이 컸다. 특히 돈 체리는 다른 누구보다 오넷 콜맨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연주를 펼쳤다. 두 연주자의 연주는 이게 뭐야? 싶을 정도로 소음의 근처를 맴도는 것 같다가도 기묘하게 음악적으로, 잘 어울렸다. 그것은 정신적 교감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화성, 멜로디, 진행 등에서 각각 연관성이 덜한 것 같지만 그 모두를 합하면 통하는 부분이 발견되는 추리 소설 같은 관계라고 할까? 1990년대에 오넷 콜맨은 하몰로딕스(Harmolodics)라고 해서 화성, 멜로디, 리듬 등에 관한 기존의 규범에서 자유로운 연주자들의 즉흥 연주가 모여 공감의 지점을 형성하는 작곡, 연주법 모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주창했는데 돈 체리의의 어울림은 그 전초라 할만했다.

아틀란틱 레이블을 떠나면서 그는 기존 쿼텟을 해체하고 데이빗 아이젠존(베이스), 찰스 모펫(드럼)과의 트리오 활동, 듀이 레드맨(색소폰)과의 쿼텟 활동을 이어갔다. 그런 중 <At the Golden Circle Stockholm>(1965), <Science Fiction>(1971) 등의 앨범에서처럼 색소폰 외에 트럼펫과 바이올린을 무대에서 연주하는가 하면 1966년에는 10살 밖에 되지 않은 자신의 아들 데나르도 콜맨을 드럼 연주자로 참여시켜 앨범 <The Empty Foxhole>을 녹음하는 등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난 음악을 만들려는 시도를 거듭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형식 자체를 무시하지 않았다. 무형식의 형식 같은 음악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작곡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위해 만든 앨범 <Chappaqua Suite>(1965),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앨범 <Skies Of America>이 그 노력의 산물이었다.

1973년 그는 모로코 방문 중에 듣게 된 자주카 마을의 민속 음악에 매료되었다. 그 음악에서 그는 서양 음악을 벗어난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래서 이 마을의 연주자들과 함께 앨범 <Dancing In Your Head>를 녹음하며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넓혔다. 또한 이 앨범에서 그는 두 명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를 기용하고 펑키 리듬을 사용하는 등 이전 그의 음악과는 또 다른 음악을 선보였다. 그것은 당시 프리 재즈를 제치고 폭 넓은 인기를 얻고 있었던 마일스 데이비스의 퓨전 재즈를 그만의 방식으로 수용했다고 할 수 있는 음악이었다. 이후 프라임 타임이라 불린 그의 일렉트릭 밴드는 90년대까지 활동하며 이 프리 펑크(Free Funk) 연주를 계속했다. 그 사이 팻 메시니와 함께 <Song X>를 녹음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프리 펑크는 질감은 다르지만 연주 방식에 있어서는 그의 초기 시절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를 알리기 위해서였는지 1987년에는 돈 체리를 비롯한 아틀란틱 레이블 시절의 쿼텟과 프라임 타임의 연주를 같이 수록한 <In All Languages>를 선보이기도 했다.

60대에 접어든 1990년대에도 새로움을 향한 그의 열망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하몰로딕스를 제시하고 이를 앨범을 통해 보여주었다. 앨범 <Sound Museum>(1996)이 그 대표적이었다. 이 외에 그는 프라임 타임을 이끌고 녹음한 <Tone Dialing>(1995)에서 힙합을 끌어들여 새로움의 강도를 높이려 하고 하워드 쇼어가 담당한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동의 영화 <내이키드 런치>(1991)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해 솔로 연주를 펼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계속했다.

1996년 이후 그는 약 10년간 새로운 앨범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 사이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이제 그의 새로운 앨범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2005년 그는 새로운 쿼텟을 결성해 독일에서 공연을 펼치고 이를 앨범 <Sound Grammar>로 발표했다. <Tomorrow Is the Question!>부터 <Sound Museum>에 이르는 앨범에서 선보였던 곡을 쿼텟 편성으로 새로이 연주한 이 앨범은 그의 자유로운 연주는 여전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다시 그의 새로운 앨범은 발표되지 않았다.

고인의 떠남에 애도의 마음을 가지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이 시대가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앨범을 필요로 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추구했던 기존의 틀을 깨고 자신만의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제는 현대 재즈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실제 <Sound Grammar>에 담긴 음악은 오넷 콜맨의 건재를 반영하는 한편 재즈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의 음악은 어느새 프리 재즈와 거리가 있는 연주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며 보편화된 문법(Grammar)이 되었던 것이다. 글쎄, 그에게 아직 하고픈 새로운 음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보다는 수 없이 많은 갈래로 갈라진 재즈의 자유로운 모습에 그가 더 이상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만 같다. 부디 그런 만족감 속에 영면에 들어갔기를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오넷 콜맨 대표작 4선

The Shape of Jazz to Come (Atlantic, 1959)

기존의 비밥을 벗어나 자유로운 형식을 추구했던 오넷 콜맨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는 전통을 처음부터 부인하지 않았다. 그의 1958,59년 앨범들이 그러했다. 비밥의 언어를 유지하면서 그와는 다른 음악을 차근차근 펼쳤던 것이다. 그 가운데 이 앨범은 이후 프리 재즈를 정의하게 될 쿼텟의 출발을 알렸던 것으로 ‘Lonely Woman’으로 대표되는 그의 작곡력과 비밥인 듯 비밥 아닌 그만의 초기 재즈를 담고 있다.

Free Jazz (Atlantic 1960)

그동안 비밥의 흔적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긴장을 부여한 색다른 재즈를 들려주었던 오넷 콜맨은 자신과, 돈 체리, 스콧 라파로, 빌리 히긴즈로 구성된 쿼텟과 에릭 돌피, 프레디 허바드, 찰리 헤이든, 에드 블랙웰로 구성된 또 다른 쿼텟이 동시에 역할의 제약이 없는 자유로운 집단 즉흥 연주를 펼치는 연주를 시도했다. 그 결과는 매우 혼돈에 가까운 충격을 주었다. .프리 재즈의 확실한 선언적 성격을 지닌 앨범이다.

Dancing in Your Head (A&M, 1976)

1973년 모로코 방문 중에 듣게 된 자주카 마을의 민속 음악에 매료된 오넷 콜맨은 이 음악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 만남에서 그는 더욱 더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음악을 변화시켰다. 그것은 두 대의 일렉트릭 기타가 참여한 밴드 프라임 타임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당시 마일스 데이비스의 퓨전 재즈에 대한 오넷 콜맨의 화답이라 할 수 있는 펑크 재즈가 만들어졌고 이것은 이후 90년대까지 이어진다.

Sound Grammar (Sound Grammar, 2006)

오넷 콜맨의 공식적인 마지막 앨범으로 퓰리처상 음악 부분을 수상했다. 약 10여년간 새 앨범을 선보이지 않았던 오넷 콜맨은 새로운 그룹을 결성해 새로운 앨범을 선보였다. 그 동안 선보인 자신의 곡에 대한 새로운 연주를 선보인 앨범에서 그는 새로움을 향한 자신의 열망이 여전함을 드러내었다. 또한 그 연주는 현대 재즈의 다양한 지형도가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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