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소설가 조셉 콘래드-실은 폴란드 출생이지만-의 대표작을 읽다. 요즈음에는 소설 자체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라는 이유로 더 잘 알려진 듯하다.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899년에 씌어졌다. 당시 작가는 선원 생활을 하며 오래 전부터 가보기를 희망했던 콩고를 다녀온 이후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유럽의 주요국가는 아프리카를 상대로 불평등 무역을 하며 제국주의적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저 어둠 한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제국주의의 무서운 현실을 묘사했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이 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 내려진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평가는 어떤 결과론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작가는 그런 것보다 지극히 심리적인 차원에서 이 소설을 쓰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까 화자인 말로가 바라본 커츠의 모습, 그러니까 한 인간이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 탐욕스러운 욕망을 꿈꾸었고 그 욕망의 종말이 결국에는 모든 것이 ‘무서웠다’는 식의 자기 성찰로 마감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커츠의 행동이 제국주의적인 면이 있었기에 후에 이러한 해석이 내려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소설을 읽다 보면 문명적으로 개화되었다는 유럽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자행하는 야만적인 약탈, 폭력 등을 제대로 느끼게 된다. 하지만 화자인 말로는 이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함께 중간중간 동조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특히 커츠의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과 공감을 함께 하는데 그 가운데 비판은 그 안에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듯한 무모한 광기이지 폭력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작가가 오늘날 비판을 받는 이유가 있다. 몇 평자들-예를 들면 나이지리아 출신의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를 들 수 있다-은 작가에 대해 제국주의의 폐해를 드러냈지만 아프리카와 흑인에 대한 시선은 그다지 따스하지 못했다, 인종차별적이었다는 비난을 하고 있다. 실제 작가의 서술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완전한 타자의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1889년 당시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인 태도에 작가가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인식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안으로 품을 정도로 넓었다고 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 역시 수용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작가가 흑인을 타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지만 반대로 그가 묘사한 아프리카의 어두운 밀림의 이미지는 다소 다르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야망을 모두 받아들이는 텅 빈 공간, 그러면서도 결국엔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무섭다’는 말과 함께 세상을 뜨게 만드는 은근한 복수의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암흑의 핵심은 커츠의 제국주의적 욕망의 심연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어두운 아프리카 밀림-자연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제국주의적 욕망을 무화 시키는 밀림의 내적인 힘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화자인 말로의 시선으로 아프리카 밀림을 묘사하고 또 그가 커츠에게 동화되었으면서도 커츠의 길을 가지 않고 깨달음을 얻은 새로운 삶으로 자신을 이끌었음을 생각하면 마지막 관점이 가장 제목에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이 소설의 문체에 대해서도 언급해야겠다. 이 소설은 말로라는 인물이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다 보니 문장의 호흡이 상당히 길다. 그리고 단락도 상당히 길다. 그래서 읽는 내내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결국 이 또한 아프리카의 빽빽한 밀림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래 전 소설이라서가 아니라 상당히 의도된 문체였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