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 – 에른스트 페터 피셔 (유영미 역, 들녘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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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읽기 편한 과학 에세이를 쓰는데 정평이 난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이번에는 과학과 미술을 같은 선상에 놓고 사유를 시도했다. 사실 과학과 예술, 특히 미술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있어왔다. 그러나 어떤 우연의 일치일 뿐,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비슷한 사회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피셔는 여기서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를 만나게 한다. 즉,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면서 과학과 미술 분야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새로운 과학, 미술을 소개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기본적으로 유사한 사고를 깔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사성은 새로운 시공간의 차원을 과학과 미술에 도입했기 때문이다. 즉, 공간적인 사고를 시간과 관련된 사고로 전환하게 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경우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임을 밝혔고 피카소는 시간에 걸쳐 볼 수 있는 모습을 하나의 시간 안에 한꺼번에 표현한 입체주의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사고는 베르그송적이다. 베르그송은 과거 공간중심의 사유에 시간을 도입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읽었다! 이런 이유로 시간을 조작할 수 있는 영화관에서 과학자와 화가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피셔는 단순히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를 만나게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후의 과학과 미술의 전개에서도 보이는 유사성을 언급한다.

피셔가 이러한 책을 쓰게 된 것은 결국 과학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이다. 과학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미술의 언어로 설명되는 것을 보고 이 책을 기획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저자는 아인슈타인과 피카소, 하이젠베르크와 칸딘스키를 함께 이야기하면서도 과학 쪽에 더 많은 서술의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런데 깊게 생각하면 이러한 서술이 단지 과학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아인슈타인 이후의 과학이 직접적인 관찰이 아니라 상상을 더 많이 방향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사유 중심의 이론 물리학이 그런 경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도 상상력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우연은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후반부에 이르러 이성과 직관이랄까? 내적인 눈과 외적인 눈이 통합된 관찰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자연과 예술이 서로 분리되어 있더라도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 약 20년 전에 레오나드 쉴레인의 <미술과 물리의 만남>을 읽었던 때가 생각난다. 미술에 조금 관심 있던 나는 이 책을 통해 과학, 특히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가운데 빛의 속도로 달리는 기차 창을 통해 보이는 세상의 모습에 대한 상상과 시간의 뒤틀림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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