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오스 – 후안 카를로스 오네띠 (김현균 역,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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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들뢰즈 커넥션>에서 후안 카를로스 오네띠의 이름이 언급되어서 부랴부랴 책을 검색하니 이 중편 소설이 발견되었다.

후안 카를로스 오네띠는 우루과이 출신의 작가이다. 그러니까 환상문학이 특징인 중남미 작가 군에 속한다 하겠다. 역시 이 소설 역시 환상은 아니지만 상당히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1954년에 씌어진 이 소설은 내용만으로 두고 보면 상당히 간결하다. 결핵에 걸린 전직 농구선수가 치료를 위해 산악도시에 오고 두 여자가 그를 방문하다가 서로 마주친다. 그리고 남자가 결국 죽는다. 이 정도가 전체 내용이다. 그런데 이렇게 줄거리를 적어도-너무 간략한 감이 있지만-스포일이 될 수 없는 것이 작가가 요구하는 것은 줄거리 따라잡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를 속이고 나중에는 독자에게 자신의 소설 사이의 여백을 메우고 이를 통해 그럴싸한 결말을 내줄 것을 요구한다. 즉 서사의 일부를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다. 특히 병에 걸린 농구 선수와 두 여자의 관계가 그러하다. 그저 추측하게 할 뿐 정확한 관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나마 부족한 정보도 소설 전체를 이 세 사람과 상관 없는 바를 운영하는 ‘나’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표피적인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갈수록 독자는 ‘나’에게 동화되어 판단하게 될 뿐이다. 여기에 작가의 함정이 있다. ‘나’에게 동화되게 하면서 정작 ‘나’에게는 확실한 사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것. 심지어 말미에는 바에 왕래하는 간호사와 웨이트리스 커플의 경험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면서 모든 것을 불확실한 것으로 놓는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꼼꼼히 읽으면서 이런저런 적극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셋의 관계는 물론 ‘나’의 시선 등에 관해서 추측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독자에 따라서 다양한 결말이 가능하다. 예로 소설 후에 에필로그 형식으로 볼프강 A. 루칭이라는 평자가 오네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면서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내려놓았는데 나는 읽으면서 그런 상상을 하지 못했기에 그 해석이 매우 놀라웠다. 하지만 해설 후에 오네띠는 작가 후기를 통해 루칭의 해석은 여러 가능한 해석 가운데 하나라고 밝히면서 독자의 능동적인 읽기를 새삼 강조한다.

오네띠의 이름이 왜 들뢰즈를 이야기할 때 언급되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수동적인 주입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창작에 참여하는 읽기를 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확실한 해석은 열려 있을 뿐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잠재적 가능성으로 무한히 존재하는 세계와 그 생성적 사유에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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