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 선생의 책은 언제나 강의를 직접 경험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복잡 난해한 내용들도 정연하게 정리되어 남는다.
이 책은 서구 존재론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그것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고전적인 존재론과 니체, 베르그송에서 출발한 근현대 존재론의 대립, 이데아의 절대권력에 대해 시뮬라크르가 새로운 대척점을 형성하는 것에 대한 고찰이다. 따라서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은 플라톤의 존재론을 알 수 있는 <소피스테스>에 등장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하늘의 위치에서 존재를 바라본 플라톤의 존재론과 땅, 현실의 위치에서 존재를 바라본 니체, 베르그송의 대립을 의미한다. 이것은 <소피스테스>의 꼼꼼한 읽기에서 출발한다. (논쟁에만 치중하는 소피스트의 거짓됨을 증명하려는 것에서 시작해 존재와 비존재, 참과 거짓 등의 존재론으로 나아가 급기야 엘레아 학파의 거두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설을 과감히 파기하고 새로운 존재론을 세우는 그 과정은 자체만으로도 한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와도 같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플라톤의 존재론을 살펴보고 다시 이와는 다른 니체와 베르그송의 존재론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그 서술 방식은 책이 플라톤, 니체, 베르그송으로 장들이 명쾌하게 구분되어 있음에도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른 존재론의 변화를 정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입체적인 비교를 한다. 그렇기에 플라톤의 존재론은 폐기되어야 할 오래된 존재론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까지 영향을 행사하는 힘을 지녔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현실 바깥에 위치한 불변의 형상, 이데아로 이야기되는 플라톤의 존재론 한쪽에 타자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역동적인 부분, 베르그송의 철학 및 현대 존재론의 단초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것은 상당한 놀라움과 쾌감으로 다가온다. 한편 역사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음에도 이 책은 이데아와 시뮬라크르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현재의 입장에서 이 양자 사이의 새로운 길을 찾아보기를 유도한다.
아울러 플라톤, 니체, 베르그송의 철학을 개괄하는 데도 이 책은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설명이 명쾌해서 좋다. 그리고 베르그송의 경우 그의 철학을 이루는 지속, 생성, 시간, 생명, 물질, 직관 등의 개념들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서 좋다. 특히 많은 베르그송에 관한 소개서들이 직관을 강조하며 그것의 설명부터 시작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후반부에 배치해서 이해가 훨씬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