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외에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을 살피다가 이 소설을 발견했다. 지난 200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홍보가 대단한 것이 큰 몫을 했다. 게다가 저자에 관한 인터뷰, 작품 세계를 조망한 작은 책자까지 부록으로 주는 한정판이라서 더 솔깃…
소설은 수용소의 삶에 관한 것이다. 작가 후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1944년 소련이 루마니아를 침공하자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루마니아가 이를 깨고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고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던 17세부터 45세 사이의 독일인들을 소련에 넘겼다. 그 독일인들은 수용소에서 처참한 삶을 살며 ‘소련 재건’을 위해 노동을 해야 했는데 그 가운데 오스카 파스티오르라는 생존자가 있었다. 작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와 함께 소설을 쓰려고 했으니 그만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세상을 뜨면서 혼자 소설을 쓰게 되었다 한다.
수용소의 삶을 이야기한다면 탈출이 있지 않는 한 어떤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힘들다. 단조로운 노동과 배고픔이 있을 뿐.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17세의 나이로 수용소에 끌려온 레오폴트 아우베르크의 눈으로 수용소의 삶을 짧은 64개의 장으로 하나씩 서술할 뿐이다. 거기에는 전체를 지배하는 어떤 큰 서사는 없다. 하지만 화자를 비롯하여 수용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생명력이 있다. 공감의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할까? 감정적인 표현이나 극적인 행동을 묘사하는 것도 아님에도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것은 작가의 글쓰기 능력에 기인하는데 아마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 대부분은 64개의 장이 소설을 구성하긴 하지만 각 장이 하나의 시와 같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은유적인 기법 때문이 아니다. 입천장까지 올라온 배고픔의 천사,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말을 생각하며 간직하는 희망, 삽질 한 번이 빵 1그램일 정도로 배고픔에 지배를 받으면서도 잃지 않은 ‘나’라는 존재감 등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과 사유 때문이다. 분명 짜인 일과를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수용소의 일상이지만 소설 속 화자는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사람을 발견하고 그 밖의 다양한 차이를 발견한다.
물론 화자가 단조로움 속에서 차이를 느끼는 것은 소설이 일종의 회상록, 그러니까 화자가 집으로 돌아와 나이가 들어 그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인 서술은 작가의 생각이 먼저 자리잡고 있다.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 작가는 그것이 문학의 명예라 생각한다. 아무튼 수용소의 비참한 삶과 귀향후의 트라우마에 대한 작가의 시적인 서술은 가슴 먹먹하고 우울한 수용소 이야기를 앞으로 이끄는 힘으로 작용하고 독자들이 큰 서사도 없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한다.
보아하니 작가는 자신이 루마니아 출신이고 독재 정부에 저항적인 작품 활동으로 독일로 건너온 이력답게 이런 지난 과거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소설들은 모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단순히 소재 때문이 아니라 시를 쓰듯 소설을 쓰는 작가의 문장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군 시절의 어느 하루 산 속에서 종일 보초를 서면서 읽으며 공감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생각했다. 그 소설 또한 소련 수용소에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당시 내 군생활과 연관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뒤 20여 년이 지난 후에 읽은 <숨 그네> 또한 그 이상의 인상적인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