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 아르까지 스뜨루가츠끼,보리스 스뜨루가츠끼 (석영중 역, 열린책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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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은 19세기 소설 외에는 그리 접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특히 현대 문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입 소문에 의해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아르까지 스뜨루가츠끼, 보리스 스뚜르가츠키-내가 이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까?-는 형제로 러시아 SF, 혹은 환상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라 한다.

이 소설은 그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환상 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첨단의 과학이나 낯선 공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내용은 간단하다. 러시아의 유명 과학자들이 미지의 존재, 4차원적인 존재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인물들에게 연구를 포기할 것을 위협받고 이에 대해 과학자들이 고민하고 포기하거나 연주를 계속하려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미지의 힘은 외계인, 절대자 등이 추측을 거쳐 자연적인 힘으로 결론지어진다.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자연이 지금은 그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먼 훗날 어쩌면 10억년 후에 지구가 멸망하게 되는 원인이 될 지도 모를 과학 연구를 그만두게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반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니까 과학의 발전이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를 편하게 해주겠다고 문명의 이기들이 등장할 수록 우리의 삶은 오히려 더 바빠지고 힘들어지지 않던가? 그것을 스뜨루가츠키 형제는 말하려 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소설의 광고 문구에 나오는 ‘낯익고 일상적인 그리고 당연시되는 현실의 이면에 은밀하게 도사리고 있는 삶의 공포를 표면화시킨 작품’이란 것은 현상적인 부분에서만 맞는 것일 뿐 이 소설의 본질을 말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생명, 가족, 미래를 위협받는 과학자들이 결국 (문명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연구를 포기하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으로 비추어지는 반면 이들의 연구 성과를 받아 책임지는 그래서 자연으로부터 본격적 위협을 받는 주인공의 친구-게다가 그는 노벨상 수상자이다. 이미 인류 멸망에 단초를 제공했을 지도 모를-는 영웅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잠깐 나오는 부분이지만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어느 정도 열린 결말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10억년 뒤의 일을 누가 알아? 그렇다고 현재를 포기할 수 있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생각했을까? 뭐 그래도 좋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반 유토피아적인 성격은 상처받지 않는다.

한편 원문이 그랬던 것인지 번역이 그랬던 것인지 어느 순간 3인칭 시점에서 1인칭 시점으로 시점이 이동한다. 말랴노프로 묘사되던 주인공이 ‘나’로 바뀐 것이다. 문학적인 효과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번역상의 오류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러면 너무나도 큰 실수가 되어 실수라 단정하기도 여려올 듯. 원문 대조가 제일인데 러시아어를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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