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이정우 선생이 2004년 철학 아카데미에서 나흘간 현대 회화의 존재론을 주제로 강의했던 것을 정리하고 있다. 평소 문학과 영화 등에 대해 선생이 관심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미술에 대한 관심은 살짝 의외였기에 일독을 결심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은 선생의 철학 강의를 듣거나 관련 책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반복의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 왜냐하면 서구 존재론사를 개괄하는 부분이 약 3분의 1가량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의 강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철학사 강의 중간에 여담처럼 등장했었던 예술관련 이야기를 따로 듣는 듯한 느낌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일단 전통 회와의 재현, 현대 회화의 표현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대 회화가 개인의 내적인 심상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또한 작가의 마음을 통해서 새로이 제시된 세계의 또 다른 얼굴, 면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전통 회화도 단지 하나의 세계를 재현하려는데 그쳤던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작가의 심상도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비너스의 탄생 같은 경우 신화의 세계를 그린 그림에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작가의 상상에 의한 세계가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전통 회화와 현대 회화에 놓여 있다고 생각되었던 불연속을 깨고 연속사로서 서구 회화사를 바라본다. 이를 기반으로 각각의 회화는 세계의 다양한 얼굴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세계가 인식 주체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질주의를 포기하고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의미를 띤다. 그래서 그 각각의 단면들이 모이고 이를 가로지르게 되면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세계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세계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그림들을 현대 회화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다양한 관점을 하나의 평면에 놓으려 했던 세잔, 하나의 대상을 다양한 시점에서 그려 정해진 본질이 아닌 시시각각 생성하는 본질로 이해했던 모네, 가능한 세계의 여러 면을 동시에 드러냈던 마그리트, 가장 원초적이고 밑바닥적인 면을 사유적으로 풀어냈던 베이컨, 역동적인 움직임으로서의 세계를 드러냈던 폴록 등이 그 예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사유를 요구하는 회화는 사라지고 우발적인 의미를 발산하는 회화, 보다 물질 그 자체로 회귀한 회화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선생의 이런 생각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존재론의 틀로 회화사와 그 그림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즉, 회화의 메타 미학을 제시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이 책은 4일보다는 한 두 시간 강의로 끝나거나 아예 보론을 많이 넣어 한 학기 강으로 나갔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거대한 틀로 회화를 바라보면서 다소 거칠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이 조금 있다. 논리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비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많은 그림들에 대한 설명이 있었어야 했다. 철학적 기본 설명과 회화의 설명이 그 전개 방식에서 따로 노는 듯한 느낌, 아예 회화가 철학적 사유의 도구로 사용된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림 안에서 너무나 많은 의미를 발견하려 하거나 집어 넣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편 선생 역시 상당 부분을 할애한 마그리트와 베이컨에 대한 설명은 각각 푸코와 들뢰즈가 한 권의 책으로 다루었던 것과 자연스레 비교하게 한다. 그러면서 역시 선생은 그림을 먼저 본 것이 아니라 철학을 먼저 생각한 것이리라 추론하게 한다. 특히 세계 문화의 흐름, 사유의 흐름 등과 회화의 진행이 완전한 시기적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내 생각에 너무 철학, 문화 흐름과 회화를 꼭 맞추려 하면서 생긴 경직된 사고인 듯하다. 회화가 알게 모르게 과학의 발전을 반영하거나 예견했다는 식의 화두처럼 그림 역시 철학, 문화의 흐름에 종속되거나 반대로 이끌 수 있다고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한다면 회화사가 더욱 더 생동감 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이런 몇 가지 의문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책은 늘 읽는 재미, 그리고 사유하는 재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