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가 시간을 기억한다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글을 제문으로 싣고 있기에 관심이 간 소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팬이다.
아무튼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이 소설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제문처럼 사건을 기억하는 장소로서의 방-특히 벽을 이야기한다. 원 제목이 <벽들의 기억>임을 생각하면 이는 더욱 명확하다. 그러나 <벽은 속삭인다>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이 한국어 제목을 다시 불어로 번역하면 <Le Murmure des Murs>가 되니 유사한 발음의 반복이 주는 맛이 괜찮다.
이 소설은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집에 세든 한 여성이 특유의 민감한 성격 탓에 지난 사건의 영향을 받게 되고 이것이 생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딸과 그로 인한 이혼의 상처와 연관되면서 예상 외의 결말로 치닫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망자의 삶을 기억하고 있는 장소들을 하나씩 생각하게 해준다.
그런데 마지막 결말이 섬찟하게 마무리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소설이 주인공의 연쇄살인범에 대한 혐오가 전남편에 전이되어 의외의 어두운 결말로 향하는 것 말고 숨겨진, 어쩌면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숨은 심리학적인 연계점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까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를 순회하면서 죽은 자신의 딸의 기억을 떠올리며 상처를 다시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인 사건이 있었던 곳에 살게 되면서 그 사건을 기억하는 장소의 영향으로 그녀 스스로도 살인자의 성향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뭐.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열린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괜찮은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