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표지에 ‘레고’라는 단어에 끌려서 선택했다. 이 책에 담긴 단편들은 작가가 1999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레고로 만든 집’으로 당선된 이후 약 2년여에 걸쳐 쓴 것들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의 시간을 담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당시 작가는 참으로 고단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나 보다. 대부분의 단편들이 외로움, 어두움, 그리고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그들은 뚜렷한 직업도 없으며 주변으로부터 소외 당해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우울한 분위기 가운데 주인공 혹은 화자들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레고로 만든 집’의 주인공이 자신의 얼굴을 복사기에 대면서 복사기 빛에 눈을 감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다른 몇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하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단편들 각각이 마음에 들었지만-특히 ‘레고로 만든 집’, ‘이 방에 살던 여자는 누구였을까?’, ‘서른 세 개의 단추가 달린 코트’, ‘당신의 수첩에 적혀있는 기념일’로 이어지는 전반의 네 작품-9편의 소설들이 모여 하나의 시공간을 만드는 것에 더 끌렸다. 단지 그간 발표했던 소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모임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낸 것이다. 예를 들면 종종 주인공 혹은 화자와 관련 있는 인물이 ‘은오’라는 이름을 하고 있으며 또 이 상대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지거나 떠나버렸다는 것, 무대로 등장하는 아파트는 15평 정도의 공간에 방 두 개의 아파트라는 것, 그런데 주로 침대를 두면 문이 완전히 열리지 않는 작은 방에 살던 사람들이 부재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잇달아 단편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앞 작품에서 부재 표시를 남겼던 사람이 이번 소설의 그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곤 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엇갈리듯 스치는 ‘윤성희식 세계’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비슷한 사건과 공간이 반복되면서 저절로 혹 이러한 점들이 작가가 어떤 연작식으로 의식을 한 것이거나 아니면 직접 겪은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편 이 단편집을 읽으며 내가 소설을 읽으며 괜찮다는 느낌을 받게 될 때는 대부분 작가가 서사를 전개하면서 여유를 잃지 않음을 발견할 때가 아닌가 자문하게 되었다. 실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만 빠지지 않고 그 중심 주변에 위치한 세세한 부분을 바라보고 그것을 시적으로 담아내는 여유가 작품을 풍요롭게 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문장은 상당히 감성적인 부분, 단지 수사가 아니라 그로 인해 보다 풍요로운 상상을 자극하는 문장들이 많아 좋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왜 난 작가의 이름이 기억되지 않을까? 윤성희, 윤성희..자꾸 중얼거려도 내가 읽은 책의 저자가 누구지?라고 스스로 물을 때마다 한번에 이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소설 속의 희미한 존재감을 지닌 주인공에 이끌려서 작가마저 그리 생각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