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들뢰즈에 대한 입문서 가운데 가장 뛰어난 책이라 할만하다. 그것은 들뢰즈를 이야기하면서도 들뢰즈의 글 자체에 얽매이지 않은 방식의 글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들뢰즈의 글을 기반으로 주석적인 설명을 넘어 클레어 콜브룩의 들뢰즈를 기도한다고 할까? 그것은 모든 서술의 키워드를 ‘차이’에 두고 있다는 것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저자는 차이에서 출발해 들뢰즈를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들뢰즈의 저술을 따라 정리하는 것과는 다른 종합적인 가로지르기를 시도한다 하겠다.
실제 이 책은 지겹다 싶을 정도로 들뢰즈의 ‘차이’를 반복한다. 그런데 그 반복은 같은 출발점으로 돌아와 새로운 방향으로 사유를 진전시키게 하는 효과를 만들어 내는 듯하다. 그렇기에 이 책은 들뢰즈를 ‘차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단선화하는 듯하지만 나름 그 안에서 다양한 분열적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이 책이 들뢰즈에 대한 좋은 입문서로 꼽히는 것은 들뢰즈를 깊게 파는데 우선하기 보다는 그것을 ‘차이’를 중심으로 종합하고 또 들뢰즈의 사유가 전체 철학적 장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책의 앞부분은 플라톤을 중심으로 한 동일성의 철학, 이를 거부하고 차이의 선행성-혹은 관계?-을 주장한 헤겔, 헤겔 철학을 비판적으로 확장한 구조주의-이들은 변증법의 절차를 통한 헤겔의 차이 대신 언어처럼 비시간, 비역사적인 체계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역설했다-를 설명하며 들뢰즈가 구조주의 또한 차이가 주체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음을 말한다. 아주 세세하지는 않지만 이 부분만 잘 읽어도 서구 존재론사에서 들뢰즈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결국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란 외적인 절대자나 구조 속의 주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차이가 아니라 그에 선행하여 그 스스로 생성하고 창조하는 차이를 말한다. 그것은 동일성 이전에 욕망으로서 부단히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차이를 생성한다. 그 차이가 영토화될 때 주체 구조, 동일성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차이는 인간중심적인 것을 넘어, 아니 선행하는 것이다. 차이 자체가 생명이라고 할 때 여기서 생명이란 것은 인간, 혹운 동식물의 생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생성 역능으로서의 차이를 강조하다 보면 그럼에도 왜 하필 우리는 주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인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즉, 왜 하필 세계는 이렇게 창조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들뢰즈가 철학을 출발한 지점이었다. 그래서 들뢰즈는 차이의 생산적인 성격이 동일화하여 사회를 만들고 또 그 안에서 개체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어찌 보면 들뢰즈 철학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독서가 필요할 듯하다. 그가 윤리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예술 등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더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두고 읽어보자.
한편 차이의 생성 역능은 그 자체로는 완전히 열린 것-그렇기에 어찌 보면 상상으로만 가능한 것-인데 이를 통해 세계를 사유하면 매우 다양한 세계가 가능하게 된다. 즉, 우리가 있는 이 세계는 생성 역능 안에 잠재된 세계 가운데 하나의 경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지금과는 다른 식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존재가 아닌 생성 중심의 사유, 사건 중심의 사유가 필요하다. 이것이 행동철학으로서 들뢰즈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그 스스로도 매번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했던 것일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