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 김진석 (개마고원 2009)

얼마 전 박홍규 교수의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이란 책을 통해 니체가 민주주의에 반대했다는 사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책을 막 읽었을 때 그에 대한 본격적인 답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니체가 민주주의에 반대했으며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밝히려 한 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홍규 교수의 책처럼 니체를 비난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직접 언급하기도 했지만 사실 박홍규 교수의 글은 다소 거친 면이 있었다. 민주주의를 반대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그 이유는 그리 명쾌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검찰 조서 같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러나 이 책은 변호사의 입장에서 니체를 바라본다. 그렇다고 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합당한 이유를 알리려 한다.

저자는 일단 니체가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조목조목 그가 반대한 내용을 밝힌다. 예를 들면 위대한 정치, 차이의 긍정, 강자의 도덕 같은 니체의 주요 생각들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민주주의에 찬동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은 이런저런 균열이 많음을 밝힌다. 그렇다고 이것이 니체에 대한 변명은 아니다. 이런 균열은 사실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생기는 균열인 것 같다. 그러니까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 니체가 왜 그런 균열 많은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비난과 찬동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모호한 철학으로 남게 된다.

어찌 보면 니체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미리 내다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모든 개인이 평등을 누리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하나의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 민주주의란 것은 고통을 피하려는 술책이자 타락의 형식이었다. 그러니까 약자의 원한이 만들어 낸 결과라 할까? 그렇기에 민주주의의 평등은 질적으로 저하된 상태에서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니체에게 있어 고통과 폭력은 어느 정도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를 통과해야 진정한 강자, 인간에 내재된 귀족적 특질을 발현할 수 있는 강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부정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그래서 니체를 신봉했던 것이리라.) 이런 그의 생각은 그래서 차이를 인정하고 폭력을 인정하며 귀족 정치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저자는 니체가 민주주의를 반대했던 이유를 이렇게 밝혀나가면서 철학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그 지점을 니체가 살았기에 이런 차이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즉, 그는 미래에 대해 오판을 했단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민주주의를 생각해 보면 니체의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평등은 멀고 먼 이야기로 남아 있지 않던가?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의심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저자는 약자들의 원한이 창조적으로 인정되면서 생겨난 것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니체의 비판에서 역으로 민주주의의 존재이유를 찾는다. 약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에 현대 사회가 복지국가를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음을 말한다. 그렇게 해서 니체의 철학은 단순히 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로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엄중 경고로 바라봐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기에 좌파와 우파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니체를 바라보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대신 좌파 우파도 아닌 그 사이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폭력에 전혀 손을 내밀지 않아도 위태롭고, 과도하게 내밀어도 위태로운 민주주의의 어슬한 균형점을 니체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펼치면서 저자는 포스트 모더니즘, 페미니즘, 파시즘 등에 니체가 미친 영향과 그 현재에 대해 조망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파시즘을 주제로 한 들뢰즈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러면서 니체의 철학이 어느 하나로 일방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교묘한 뒤틀림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정치적 면이 탈색되고-특히 권력에의 의지를 힘에의 의지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 심오한 철학자로서의 이미지만 수용되고 있음을 밝힌다.

8 COMMENTS

  1. 을 읽고, 몇몇 구절 깊이 감동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감동적인 부분이 어떻게 보면 반민주적으로 읽힐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비난과 찬동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모호한 철학”이란 말이 진심 공감됩니다.

    모든 사상은 그 사상을 펼친 저자의 의도 그대로 해석되기보다 독자의 시대적 상황과 독자 개인의 성향과 연결되어 해석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작의 원래 목적, 의도를 알고 싶다면 그 자체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 않을까요? 근본적인 목적과 의도는 그 글을 쓴 사람만 알수 있는거니까요.
    히틀러 같은 전체주의적..파시즘적 인간에게는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사상, 학자도 도구적 존재 그 이상도 아니겠죠. 그리고..히틀러가 절대적 악인 같지만,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글을 읽게 되면… 평범한 개인들의 성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개인적으로…이 책과 함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도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에구구…”” 괄호 표시를 인식못하는 것 같네요. 암튼..생략된 부분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입니다.

    • 괄호표시가 인식 안되는군요.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글과 말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발화는 주체의 몸을 떠나는 순간 오해의 가능성을 품게 되지요. 그것이 더 큰 성찰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러니 학문이 생긴 것이겠지요. ㅎ한나 아렌트의 책 늘 마음에만 두고 읽지 못하고 있네요. 더구나 요즈음 같은 경우는 더 읽기 어렵네요. 그래도 언젠가는…ㅎ

    • 오해의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큰 성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씀… 완전 공감합니다. 행위자의 의도와 그 영향에 따른 결과는 결코 인과적이지 않더라고요.

      책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절인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연닿는 때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그렇죠. 인연이 있다면 읽게 되겠죠? 삶이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 것도 행위자의 의도와 달리 오해가 있기 때문이겠죠? ㅎ

    • ^^그렇죠… 그런 오해때문에 삶의 우연성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삶이 지루하지 않고 역동적인 것 같기도 하고요..

    • 두 개의 다른 필연이 만나 우연이 만들어 지고 다시 두 개의 우연이 만나 필연이 만들어지는 것이 삶이겠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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