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소설가 아니 에르노를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녀의 이야기들에 그리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담담한 문체는 마음에 들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을 찾게 되는 것은 사소설적인 분위기가 묘한 관음증적인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생활을 엿보는 느낌이랄까? 그 정점이 <단순한 열정>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이번에도 그녀의 책을 보자마자 선택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원제가 ‘La Place’임을 먼저 확인했어야 했다. 그대로 번역하면 ‘자리’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소설은 1988년에 ‘아버지의 자리’란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나는 이 소설을 그 무렵에 읽었던 것이다. 뭐, 새로 번역하면서 더 어울린다 생각되는 제목을 새로 붙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경우 ‘아버지의 자리’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이 소설은 그녀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설령 보다 보편적으로 생각해도 그녀 이전의 아버지 세대의 초상이지 일반 남자의 이야기는 아니다.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은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의 삶을 정리해보자는 마음으로 딸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1차 대전 전에 태어나 두 번의 전쟁을 겪었고 공원의 삶에서 식료품과 카페의 사장으로 옮겨간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아주 크지는 않지만 보아 편하고 안정적인 삶의 구축이었다. 아무튼 그런 삶 속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그만의 삶이자 그 시대 아버지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녀는 공원 아버지보다는 조금은 더 부유한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다시 이를 넘는 계층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시선은 아버지의 삶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어쩌면 조금은 부족했다는 식이다. 그렇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차이가 후에 그녀와 아버지의 거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런저런 경구로 삼을 법한 구절이 나온다. 그 가운데 이 구절을 기억하고 싶다.
‘내가 아버지의 모습을 찾은 것은 사람들이 역 대합실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방식, 그들이 역 플랫폼에서 아이들을 부르고, 누군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방식 가운데에서였다. 아무데서고 마주칠 수 있는 익명의 존재들은 그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힘이나 굴욕의 징표들을 지니고 있었고, 바로 이들에게서 난 아버지의 조건의 잊어버린 실체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 구절은 그녀가 그린 아버지의 삶이 우리 번역본으로 120페이지를 조금 넘는다는 것과 맞물려 짠한 여운을 준다. 그만큼 그녀의 아버지는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일까? 만약 내 아버지의 삶을 쓴다면 나는 과연 몇 페이지를 쓸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녀의 초기 작품으로 이 소설로 그녀는 1984년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말하자면 그녀의 성공을 이룬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