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강 – 엔도 슈사쿠 (유숙자 역,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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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일본 문학은 소소한 맛은 있지만 다소 가볍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민음사 세계 문학전집에 포함된 일본 소설의 고전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들의 깊이와 표현에 감동하게 된다. 엔도 슈사쿠의 이 소설도 마찬가지.

처음에 나는 이소베의 아내가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나고 그 와중에 자원봉사자 미스꼬를 만나는 초반 내용을 보고 새로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이 소설은 그보다 더 큰 주제를 담고 있었다.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소설은 각각 사연을 안고 있는 네 사람이 인도 여행을 하게 되면서 그 곳에서 그 동안 자신에게 짐이 되었던 괴로움, 고민을 해결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 이소베는 그 네 명중의 한 명이고 그의 에피소드는 그가 인도로 떠나게 하는 동기였다. 미스꼬도 마찬가지 네 명 가운데 한 명이다.

이 소설의 제목 ‘깊은 강’은 갠지스 강을 의미한다. 죽은 자를 받아주고 산 자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어머니와도 같은 강으로 작가는 이 강을 묘사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설은 상당히 종교적인 색채를 지닌다. 미스꼬와 관련된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오쓰가 프랑스로 건너가 신부가 되지 못하고 인도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서양의 기독교적인 신 관념에 회의를 느끼고 그와는 다소 다른 새로운 종교관을 소설 속에 불어넣는다. 그것은 동양적인 기독교라고나 할까? 모든 사람을 널리 사랑한 예수의 정신을 보다 확장한 듯한 종교관이다. 따라서 소설 속 네 사람이 갠지스강에 모였다고 해서 작가가 힌두교에서 결론을 찾는다고 보지 않는다. 오쓰가 기독교를 버리지 않는 것이 이를 말한다. 작가는 기독교의 기본 이념이 아니라 제도화되고 배타적이 되어버린 제도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모든 종교가 소통하는 새로운 세상을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네 명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상당히 흥미로웠다. 자신을 찾으라며 죽는 아내, 그리고 그녀의 부활을 찾아 인도로 떠나는 남자. 기독교에 신실한 남성을 희롱한 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인도로 오는 여자, 자신이 아팠을 때 큰 위로가 되었던 구관조가 자신이 회복하는 날 사망한 것을 두고 이를 잊지 못해 인도로 온 남자, 미얀마 전쟁터에서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어야 했던 처참한 상황을 트라우마처럼 안고 인도로 온 남자. 모두가 흥미롭지 않은가? 각자의 이야기를 네 권의 소설로 풀어갔다고 해도 소설은 상당한 완성도를 띄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네 사람이 서로에게 위로를 해주면서 함께 문제의 해결을 풀어나가게 함으로써 보다 복합적인 의미를 띠게 한다. 사실 네 주인공들의 결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아내의 부활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으며 구관조를 하나 사서 풀어준다고 그것이 완전히 해방될 수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던가? 그러나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네 사람이 서로의 삶을 알고 이해하게 되면서 나만 괴로움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지. 그러니까 갠지스강이 사람을 평화로이 하는 것처럼 개인의 마음에 흐르는 강이 서로 모여 깊은 강을 이루면 그 함께 나누는 고통으로 인해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작가의 삶을 보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 상당 수가 자신의 삶과 직접 관련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참 힘든 삶을 살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소설쓰기는 하나의 구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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