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으로 전혜린을 떠올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먼저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예수의 수난을 다룬 흑인 영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제목을 따 왔다.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이 소설은 전후 문학이라 할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의 궁핍한 사회상을 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미리 말하지만 마음이 울적한 사람은 이 소설을 보지 말라. 깊은 우울에 빠질 지도 모른다. 어쩌면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담담함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지도 모른다.
소설은 폐허가 된 도시에서 아내와 세 자녀와 단칸방에서 살다가 그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밖에 나와 도시 이곳 저곳에서 잠을 해결하고 있는 성당의 전화 교환수 프레드 보그너와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한 케테 보그너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서술이 프레드와 케테의 시점을 오간다. 그래서 두 부부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또한 소설은 두 부부가 싸구려 호텔에서 재회해 하루 밤을 보내는 주말의 이틀을 시간적 무대로 하고 있다. 장편의 시간으로는 매우 짧은 시간적 무대이지만 이를 이용해 작가는 독일의 전후 모습을 매우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 두 부부를 통해 드러나는 전후의 사회상은 희망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보그너는 전쟁 이후 무기력함에 빠져 있으며 다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케테 또한 이런 남편의 모습, 단칸방에서 주인 눈치를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며 이혼을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는 전후의 현실에 그리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피폐한 상황에서도 화려한 의식을 감행할 뿐이다. 또한 부분의 자녀들은 판자로 벽을 만든 공간에서 침묵을 강요 받아 어느새 웃음이 사라진 아이들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독일의 미래였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모습을 확인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급기야 우울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이 소설은 제목이 차용했다는 흑인 영가의 내용인 예수의 수난을 보그너 부부를 중심으로 한 전후의 독일인들에게 이식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나마 작가는 소설에서 작은 간이 식당을 운영하는 아름다운 소녀와 농부의 모습을 한 신부를 통해 그래도 희망은 조금 남아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도시를 밝히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서 보그너가 다시 가정을 꾸리게 되는 행복한 결말을 과감하게 그리지 못하고 그럴 지도 모른다 수준의 암시를 주고 마무리 되었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물며 책의 내용은 자신의 추억으로 담고 있는 사람은 오죽하랴. 그럼에도 이 소설이 인기를 얻었던 것은 그 절망감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독자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 ‘인생은 고통이다’라고 확신하는 사람 중 한명입니다. 고통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고통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 고통을 깊이 받아들일때 가능하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리뷰를 보니, 읽고 싶은 마음이 더 드는 것 같습니다만..^^
요 며칠 이 책이 왜 인기 글로 검색되는지 모르겠네요. ㅎ
인생은 고통이기에 쾌락, 행복이 가치를 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고통을 받아들일 때 그것을 피할 수 있다라는 말씀은 고통을 고통이 아니게 하기, 무화하기 같습니다.
아무튼 말씀에 동의합니다.
제가 삶을 고통으로 인식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ㅎ
아..메인페이지 book코너에 요책이 딱 있더라고요. 썸네일로 노출되는게 랜덤으로 설정된 건 아닐까싶습니다. 그 덕에 전 좋은 책을 발견했습니다만.^^
하긴, 고통도 인간의 사고로 만들어 진거라면 무화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고통도 인식의 산물이니까요.
그니까 그게 여러 사람이 클릭해서 전면에 표시된건데 하루가 아니라 며칠 걸려 있기에 의외네요.
아픔이 이어지면 심장에 굳은 살이 생긴다고 하는데…사실 그러면 죽잖아요.
고통은 고통이다 싶기도 합니다.
요 며칠 신경써야할 일이 많이 생겨서 한번 한탄을…ㅎ
^^ 아마도 제목이 매력적이라 꽤 오래 노출되었던 것 같습니다만..
맞습니다. 모든 게 인식의 산물이라고는 하지만, 그 당시 내가 겪는 고통은 고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죠.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고 같은 자극에도 다르게 반응하는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면 또 다른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통의 순간 도대체 이런 결론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하네요. 그럼에도 현실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힘내봐야겠지요.
우리의 귀가 소음에 익숙해지다가 이내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되듯이 고통도 익숙해지는 순간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엔 심장이 뛰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겠죠.
적어도 인간이 되지 않거나. 다행히 시간이라는 약이 있기는 합니다만…
따라서 고통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야 말로 죽지 않는 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ㅎ
그냥 일단 아프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