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 에밀 아자르 (이주희 역, 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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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란 이름으로 처음 발표한 소설이다. 로맹 가리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의 문학적 삶을 쇄신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로칼랭>을 통해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 작품인 <자기 앞의 생>으로 절정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어 역자와 출판사는 이 소설의 저자를 로맹 가리로 했다. 분명 같은 사람이고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로맹 가리의 이름으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놓고 책의 저자로 로맹 가리를 쓴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냥 에밀 아자르였어야 했다.

이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소외, 도시의 반자연적인 속성을 건드린다. 주인공 쿠쟁이 비단뱀을 기르게 되면서 생기는 일들과 심리적 변화를 그리면서 작가는 대도시 파리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이며, 또한 그것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되어버렸음을 한탄한다. 그러면서 생태학적인 서사를 전개하는데 그 전개가 무척이나 신선하다. 하지만 그 신선함만큼 독자의 입장에서 쿠쟁의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뱀이 똬리를 틀고 굽이치며 앞으로 나아가듯 소설 또한 마치 횡설수설하듯 주제를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하면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어의 사용에서도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단어를 장난처럼 사용하면서 의미의 고정된 망을 흔들기에 이해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뜻을 모르는 표현을 자주 신중히 사용해. 적어도 거기에는 희망이 있으니까. 이해를 못하면 가능성이 있는 거야. 그게 내 인생관이야. 나는 항상 주위에서 모르는 표현을 찾지 그러면 적어도 그게 다른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273p)라는 쿠쟁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이러한 말장난을 획일화된 사회를 흔들고 새로운 관계의 희망을 찾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로 칼랭은 ‘큰 포옹’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쿠쟁이 비단뱀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준 것은 비단뱀이 그를 칭칭 감아 조이면 누군가 안아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 이해가 뱀의 이미지처럼 꺼림직하고 피하고 싶은 것이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싶다. 쿠쟁이 좋아하는 그녀 드레퓌스가 사무실 일은 지루하고 의미가 없다며 사창가에서 매춘을 하기로 결정한 것, 그러면서 이 일이 더 생기 넘치고 변화무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구체적인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 그렇지만 그것에 경제적인 주고 받음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1974년에 씌어졌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6년의 파리를 그리고 있는 것인데 그 때부터 거대 사회의 문제가 드러났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여전한 우리의 문제로 남아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소설이 여전히 공감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 하겠다.

한편 소설은 처음 출판되면서 출판업자들의 의도에 따라 결말이 수정되어 선을 보였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작가가 의도한 결말이 공개되었다. 이 책은 그 두 결말을 다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출판업자의 요청에 의해 수정된 초판의 결말이 더 마음에 든다. 작가의 결말은 보다 더 상상력을 극한으로 밀고 나가 자연주의적, 생태학적인 결말을 내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소설적인 맛은 여운을 남기며 파리라는 대도시에 쿠쟁을 쓸쓸히 남기는 초판의 결말이 훨씬 강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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