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곡예사 – 폴 오스터 (황보석 역, 열린책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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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었다. 결혼 전 마눌님이 읽었던 책들 사이에서 발견했다.

폴 오스터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아니 그저 그 작가의 소설이 읽을 만 하다고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나는 그를 어떤 심오한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 작가일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접할수록 그건 그의 소설의 중심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면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폴 오스터의 뛰어난 장점은 그의 탁월한 이야기 꾼으로서의 능력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내용은 1920년대 중후반 무렵 월터 롤리라는 9세 소년이 허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 이후 그의 삶을 자서전적으로 그려낸 내용을 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사람이라. 그것도 속임수 없이 그 자체로 하늘을 나는 사람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기정 사실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그래서 월터 윌리가 공중에 처음 뜨는 순간도 매우 담담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이 하늘을 나는 법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이를 믿지 못한다면 독자는 의심 많은 바보일 것이라 압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나는 폴 오스터의 소설도 환상문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르헤스처럼 있지도 않는 사실을 있는 듯이 건조하게, 그래서 신뢰가 가는 문체로 그려내는 환상 문학 말이다.

한편 소설에 그려진 월터 윌리의 삶은 어떤 성공의 예로 제시되지 않는다. 그의 삶은 정말 현기증(Vertigo!)이 날 정도로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이 얽혀 있다. 하늘을 나는 능력을 얻기 전의 고통, 이후의 상승, 능력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이후의 하락 다시 상승과 하락이 이어지면서 처음에는 하늘을 날게 된 소년의 고통 속 성공이 주일 것 같다는 내용이 그의 삶 전체로 확장된다. 그래서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삶은 다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니 궁극적 의미는 증발하고 이야기만 남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만약 예후디 사부의 죽음에서 소설이 끝이 났다면 하늘을 나는 능력을 지닌 소년이 성공 후 성장하면서 그 능력을 쓸 수 없게 되어 모든 것이 한낮 꿈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하늘을 나는 사람은 실재 존재하지만 이제는 전설로서만 회자된다 정도로 이야기가 요약될 수 있었고 그것이 또 더 소설적으로는 좋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특히 여운의 문제에서는.

이 소설의 원제는 “Mr. Vertigo”다. “현기증씨”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 표현이 소설 제목으로 하기엔 어색함이 있을 지 몰라도 “공중 곡예사”라는 소설 제목은 좀 아니었다 생각된다. 차라리 미스터 버티고로 하는 것이 더 나았을 지도.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소설은 2001년 신판 3쇄인데 오탈자가 너무 많다. 그리고 “그는 내 대답에 질문할 수 없었다”같은 논리에 맞지 않는 번역도 눈에 띤다. (이것은 오역이 아니라 그냥 실수리라.) 요즈음 나온 책에서는 이런 실수가 해결되었는지 모르지만 1995년 이 책이 처음 번역되어 나왔을 때만해도 이미 역자는 폴 오스터의 책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었던 만큼 조금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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