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재즈 연주자들이 클래식과 재즈의 만남을 시도 했고 그 시도를 위해 많은 클래식 곡들이 재즈라는 틀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과연 몇이나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 대부분의 시도들은 다소 불순한 상업적인 의도를 품고 있었다. 즉, 잘 알려진 클래식을 재즈로 연주하여 보다 세를 넓혀보자는 식의 정치적인 의도가 우선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연주자들이 이러한 재즈 부흥회를 위해 클래식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 음악들은 대부분 쉬운 재즈를 지향했기에 클래식의 멜로디를 테마로 삼고 여기서 출발한 안정적인 즉흥 솔로 연주를 펼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은 클래식과 재즈의 만남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기에는 너무나 형식적이다. 과거 재즈가 뮤지컬이나 영화 음악을 재즈로 연주했지만 결코 뮤지컬과 재즈의 만남, 영화와 재즈의 만남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던 것과 같다.
결국 음악적으로 클래식과 재즈를 결합한다는 것은 양 쪽 음악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그러니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하는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 등가적 관계에서 새로운 무엇을 창조해 내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예로 키스 자렛은 결코 클래식의 고전을 재즈 연주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스스로 직접 클래식적인 어법으로 작곡을 하고 이를 다시 재즈적인 연주와 결합하는 식의 연주를 펼쳤다. 이것이 클래식과 재즈의 만남의 모범이 아닐까 생각된다.
피아노 연주자 유리 케인 또한 독창적이고 또 모범적인 방식으로 재즈와 클래식을 결합해 왔다. 재즈도 클래식도 아닌 제 3의 무엇을 만드는 것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한 그의 클래식의 재즈적 해석, 해체 작업은 상당한 문화 비틀기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Primal Light>
유리 케인이 처음으로 독창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던 클래식 작품은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이었다. 구스타프 말러는 보통 후기 낭만파 음악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의 음악들은 낭만파에서 초기 현대 음악으로 이행하는 시대의 흐름이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클래식 작품들은 다른 낭만파 작곡가들에 비해 접근이 그다지 쉽지 않다. 그러나 한번 그의 음악적 매력을 알게 되면 다른 어느 작곡가의 음악보다도 그의 음악을 좋아하게 된다. 나 역시 그의 5번 교향곡이나 대지의 노래 등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런 말러의 작품을 유리 케인이 대하는 태도는 자못 도발적이다. 그가 말러의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은 단순한 편곡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말러의 음악을 새로운 문화적 틀 안에 넣고 새롭게 주조해 낸다. 이것은 앨범의 첫 번째 곡 “Symphony no.5, Funeral March”부터 시작된다. 원래 말러의 교향곡 버전은 장엄함과 웅장함이 주된 정서로 자리잡고 있지만 케인의 해석은 익살스럽기까지 한 말 그대로의 행진곡풍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클레즈머 음악의 요소가 조금씩 드러난다. 이처럼 원곡의 분위기를 반대로 역전시켜 연주하는 경향은 앨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앨범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마지막에 수록된 “대지의 노래”다. 이 곡은 얼핏 보면 축소된 편성이지만 원곡이 주는 비감(悲感)의 느낌을 나름대로 잘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론 벤수산이 헤브라이어로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즉, 유리 케인은 유대 음악의 전통에 입각하여 말러의 음악을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유대 음악적 분위기로 말러의 음악을 해석했을까?
그것은 바로 구스타프 말러가 오스트리아인이었지만 혈통상으로는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말러는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케인은 말러의 음악을 다시 유대 문화 안에 위치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왜 그리도 말러의 음악을 케인이 뒤틀어 보았는지 이해가 쉽게 된다. 물론 나는 케인이 말러를 다시 음악적으로나마 유대교로 개종시키려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말러의 음악에, 아무리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하더라도 변할 수 없는 유대인으로서의 흔적이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했기에 이러한 해석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말러의 음악에 보다 더 정통해야 하므로 가장 기초적인 말러에 대한 이해밖에 지니지 못한 내겐 능력 밖의 일이다.
<Wagner e Venezia>
유리 케인이 두 번째로 접근한 음악은 다름 아닌 바그너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겐의 반지”,”탄호이저”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바그너는 장대하고 감정의 과잉이라 생각될 정도의 웅장한 사운드로 낭만주의의 극단을 표현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말러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던, 그러나 그 개인은 반 유대주의자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 유리 케인은 말러의 경우와 정 반대로 바그너의 낭만적 상상력에 딴지를 걸지 않는다. 그보다는 다른 차원에서 바그너의 음악에 접근한다. 이를 위해 먼저 바그너를 해석한 앨범의 제목이 <Wagner e Venezia>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니까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되 그가 베니치아에 머물던 시절의 바그너, 바그너가 머물던 당시의 베네치아를 사실적으로 새로이 재현하는 것이 케인의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유리 케인은 바그너의 거대한 사운드를 독특한 6인조 실내악단을 위해 새로이 편곡을 하고 바그너가 한번쯤 묵거나 들렀을 베네치아의 그란 콰드리 카페와 메트로폴 호텔에서 관객을 앞에 두고 녹음을 했다.
이처럼 시대의 재현이 목적이었던 만큼 음악이 정통 클래식처럼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유리 케인은 녹음 후에 사운드에 변형을 가하여 정통 클래식에서 벗어난다. 먼저 연주는 6인조 실내악단이 연주를 했지만 정작 사운드는 10인조 이상의 악단에서 나올 수 있는 규모로 들리는데 이것은 정확히 앨범에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오버더빙을 통해 사운드를 부풀렸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감상자의 청음 지점을 묘하게 흔들리게 하여 환상성을 가미시킨 부분은 이 앨범을 감상하는데 가장 주요한 핵심이다. 그러니까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연주와 연주 사이 카페의 소음을 그대로 삽입했는데 이 부분을 들을 때 앨범의 감상자는 공연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되면 교묘히 청취 지점은 이동하여 무대의 연주자 바로 옆에서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상주의 화가 세잔이 가장 현실적인 풍경이라며 초점을 흐리게 하여 그림을 그렸던 방식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앨범 속에서 직접 연주를 듣는 감상자와 앨범 밖에서 녹음된 음악을 듣는 감상자는 서로 다른 음악을 듣고 있는 셈이 된다. (이것은 후에 유리 케인이 음악 감독 역할을 했던 <The Sidewalk Of New York: Tin Pan Alley>(Winter & Winter 1999)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결국 유리 케인은 바그너가 머물렀던 베네치아와 그 시대를 재현했지만 그것을 다시 환상적으로 처리함으로써 바그너의 음악이 지닌 부풀어진 상상을 색다르게 표현했다.
<Love Fugue: Schumann>
유리 케인의 클래시컬 여행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 여행의 세 번째 도착지는 낭만파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인 슈만의 음악이었다. 사실 유리 케인의 클래식 해석이 돋보이는 것은 매번 새로운 관점, 방식으로 음악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이번 슈만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는 이전의 바그너, 말러에서와 다른 새로운 방식을 사용한다. 그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윈터 앤 윈터 레이블에서 슈베르트를 연주한 정통 클래식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던 La Gaia Scienza에게 슈만의 “Klavier Quartett op. 47”을 원곡대로 연주하게 하고 유리 케인이 편곡한 슈만의 “Dichterliebe op. 48 (시인의 사랑)”을 유리 케인 앙상블이 현대적으로 연주하게 한 다음 이 두 연주를 교묘히 병치시켜 배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두 작품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슈만의 두 작품들은 각기 완결된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서로 하나로 묶여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 새로운 의미는 편집이라는 기술적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 진다. 이것은 케인이 연주자, 편곡자의 입장을 넘어 기획자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이 앨범을 제작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Dichterliebe op. 48”을 편곡하면서 케인은 일본어, 독일어, 영어 내레이션을 몽환적인 사운드에 첨가하여 환상적이고 신경질적인 슈만의 정신 세계를 연상시키게 한다.
<Goldberg>
앨범 <Goldberg>는 문화적인 입장에서 클래식을 다루었던 유리 케인의 관점, 상상력이 가장 폭넓게 적용된 앨범이다. 두 장으로 된 이 앨범을 듣게 되면 누구나 그 음악적 양식의 다양함에 놀라게 된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서구 음악 양식을 다 동원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앨범에 등장하는 양식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래서 마치 백 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보고 있는 듯한 현란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왜 그리도 많은 양식을 동원하여 바하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변주했을까? 그것은 절대적 의미로 남아 있는 바하의 음악에 가변적인 시공간성을 부여하려는 의도의 반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인간적인 감정보다 범우주적인 절대성이 더 많이 드러났던 바하의 음악을 탱고, 보사노바, 왈츠, 가스펠, 테크노 등의 다양한 음악 문화, 헨델, 비발디, 라흐마니노프, 모차르트, 현대 음악, 재즈 등의 다양한 음악 사조, 그리고 현대적 녹음 및 편집 방식을 적용하여 인간적이고 가변적인 음악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리 케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해체 및 조립하는 그 근본에는 대위법이 감추고 있던 저 속에 작은 소리로 남아 있는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또 다른 소리들을 위로 끌어 올리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 경우 바하가 멜로디 아래에 구축했던 절대적인 화성의 건축은 상대적인 것으로 바뀐다. 즉, 바하가 수학적 계산에 의한 절대적 음악을 만들려 했다면 케인은 그 수학적 엄격함 속에서 새로운 우연성을 찾으려 한 것이다.
<Dark Flame>
<Love Fugue: Schumann>과 <Goldberg>는 모두 1999년에 3개월 간격으로 기획된 것이다. 말하자면 유리 케인은 두 앨범을 동시에 진행시키고 있었다는 셈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1970년대 왕성한 상상력과 표현력으로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이틀에 석 장까지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던 키스 자렛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여기에 1999년의 작업을 하나 더 추가시켜야 한다. 발매 시기로는 한 참 후인 2004년에 발매된 <Dark Flame>이 바로 그 대상인데 이 석장의 앨범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하나의 거시적 세계가 그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아무튼 다시 말러의 작품으로 돌아온 이 앨범은 <Schumann>의 시성과 <Goldberg>의 다양한 음악 형식이 결합된 음악을 들려준다. 사실 나는 이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Goldberg>가 어쩌면 유리 케인이 클래식의 독창적 해석 작업에서 지향했을 정점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정한 결정판은 바로 <Dark Flame>이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한 세 앨범을 함께 놓았을 때 <Dark Flame>은 이 두 앨범을 새로이 종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앨범을 들어보면 다양한 음악 양식의 혼재, 인간 목소리를 신비로이 활용한 시성 어린 사운드 등 두 앨범의 장점들이 <Dark Flame>에 모여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세 앨범이 거의 동시에 녹음되었다는 것에서 혹시 유리 케인은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자신이 고안한 해석 방향을 가능성의 수에 따라 나누고 종합하여 세 장의 앨범을 녹음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유리 케인의 궁극의 클래식 해석 작품을 아직 만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관점에서 음악적 결과가 가장 뛰어난 앨범을 말한다면 나는 이 앨범을 꼽고 싶다.
한편 말러의 음악을 다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앨범을 그의 첫 클래식 해석 작품 <Primal Light>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앨범 타이틀만 하더라도 비교의 욕망을 자극한다.) 이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케인은 유대 문화를 넘어 중국, 일본 등의 아시아적 색채까지 가미하여 보다 확장된 문화적 포용성을 보이고 있다.
<Diabelli>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을 해석한 <Diabelli Variations>는 우리 케인의 클래식 해석 가운데 가장 밋밋한 평가를 받았던 작품이다. 왜냐하면 앨범은 다른 어느 앨범보다 정격 클래식의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앨범을 들어보면 원전 악기로 연주하는 콘체르토 쾰른의 현악 오케스트라와 역시 원적 악기로 연주하는 유리 케인의 피아노가 상당히 클래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만약 클래식 원곡을 듣지 못했다면 그냥 일반적인 클래식 곡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러 재즈 필자들은 마음먹고 “클래시컬하게 연주한 앨범”이라는 식의 단순, 단편적인 언급으로 이 앨범에 대한 소개를 지나쳤다.
그러나 앨범 내지에 34곡의 수록곡 숫자(테마와 33개의 변주곡으로 구성)에 맞게 수록된 34장의 오래된 건물들의 설계도, 스케치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 곡의 원곡이 피아노 곡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생각해 보자. 그 뒤 트랙의 구분에 상관하지 말고 앨범 전체를 감상해 보자. 그러면 앨범이 34개의 곡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보다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피아노 콘체르토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그러니까 유리 케인의 의도는 이렇다. 테마의 변주곡 형태로 구성된 개별곡을 종합하여 하나의 건축적 세계 속에 위치시키자는 것이다. 어찌보면 정작 유리 케인 자신은 절대성을 해체시켰던 바하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지닌 절대적 성격을 이 디아벨리 변주곡에 불어넣으려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Plays Mozart>
끝으로 모차르트를 주제로 한 앨범 <Plays Mozart>은 <Goldberg>의 축소판이라 할만하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교향곡 등을 재즈, 록, 일렉트로니카, 클레즈머 등의 양식과 결합하여 연주하는 것은 확실히 <Goldberg>의 연장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Goldberg>에서의 다채로운 결합이 모든 음악의 기저로서 바흐가 갖는 중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면 이 앨범에서는 변주가 다소 형식적인 느낌이 강하다. 모차르트의 밝은 정서가 다양한 양식에서도 지속될 수 있음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을까? 분명 여전히 파격적이며 주관적인 시도가 신선함을 주지만 설득력의 차원에서는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이 앨범에 담긴 음악적 성과가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 그래서 신선함을 넘는 충격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 앨범을 다르게 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유리 케인의 독창적인 클래식 해석 작업을 거칠게 조망해 보았다. 그 결과 유리 케인은 단순히 음악적인 차원이 아니라. 보다 거시적인 문화적 차원에서 각 클래식 곡들을 바라보고 새로운 도발적 해석을 시도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클래식의 재즈적 해석, 해체 작업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이쯤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음악 감상이냐, 음악 감상이 그리 복잡할 필요가 있느냐 반문할 지 모른다. 나는 음악은 그저 편안하게 들었을 때 좋은 것과 진지하게 전존재를 집중했을 때 감동을 주는 것으로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 진지한 감상이 결코 머리만 피곤하게 하는 것은 아님을 말하고 싶다. 오히려 가슴의 감동으로 이어지는 지적인 쾌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음악과 세상을 새로이 바라보는 방식을 터득하게 해 준다. 유리 케인의 클래식 해석 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쾌감을 주는 좋은 예이다.
goldberg variations를 몇곡 검색해서 들어봤습니다.
마치 잘 만든 sf소설을 읽는 느낌이 드네요.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재즈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깬다고 해야 하나요?…
변화가 많죠. 그러면서 통일된 맛도 있고…모든 음악의 집대성 같은 느낌…ㅎ
아하..맞아요. 통일성 때문에 변화들이 오히려 더 의미있게 와닿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흐가 거기 있기 때문이죠. ㅎ
오호..^^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