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가을 일본에서 솔로 콘서트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앨범 활동으로 보면 현재 키스 자렛의 활동은 트리오가 전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체력적인 문제 때문이건 아니건간에 그의 활동이 트리오에 국한되었다는 점은 많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이틀 동안 3장의 앨범을 각기 다른 편성으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면서 녹음했던 그의 한창때의 창조성을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한가지 정도의 다른 편성의 연주를 들어보고 싶은 것이 현재 대부분의 키스 자렛의 팬들의 바램이 아닐까? 그러나 단연코 키스 자렛은 편성상 트리오 활동만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트리오라는 양식 자체에 얽메여 자신의 음악적 가능성을 축소하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현재 자신의 (체력적) 한계를 과감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를 트리오라는 형식 안으로 적절히 변용, 흡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을 우리는 이미 지난 두장의 앨범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트리오 연주의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이 앨범들은 전형적인 스탠다드 트리오의 연주를 예상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번 앨범이 우리앞에 나타났다.
2002년 6월 재즈 페스티발-키스 자렛 트리오의 14번째 참가였던-이 있었던 프랑스의 Juans-Les-Pins의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비내리는 공연장에서 가졌던 연주를 담은 이번 앨범은 지난 두장의 앨범에서 보여주었던 새로운 영역으로의 도약에서 방향을 전환해 다시 스탠다드 곡들을 들려준다. 그러나 필자는 이 앨범을 원래 상태로의 복귀가 아닌 역시 키스 자렛의 다양성 추구의 일환으로 생각한다. 키스 자렛은 자신의 연주를 자신있게 펼치면서도 자신을 좋아하는 애호가들의 마음을 읽었다. 만약 이번 앨범이 지난 두 장의 음악 스타일을 따르는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큰 감흥을 얻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리 맛좋은 새로운 음식도 많이 먹으면 질리는 것처럼 연달아 석장의 확장적 성격이 강한 비슷한 앨범을 발표했다면 내용에 상관없이 이번 앨범은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다시 스탠다드 곡을 연주하고 있는 이번 앨범은 지난 해의 앨범에 대해 상대적으로 현재의 키스 자렛 트리오 안에서 시도할 수 있었던 다양성이요 신선함이라 생각한다. 연주 자체의 새로움은 그렇게 많이 드러나지 않지만 오랜만의 스탠다드 연주이기에 기본적으로 관심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앨범이 기존의 전형을 벗어나지 않는 키스 자렛 트리오의 연주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새롭지 않으면 키스 자렛 트리오가 아니라 할만큼 이번 앨범에도 계속 싱싱한 연주를 들려주었던 키스 자렛 (트리오)의 특징이 유지되고 있으니 말이다. 차이와 반복의 절묘한 결합이라고 할까? 그것은 연주곡목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미 한두 차례 연주했었던 If I Were A Bell, My Funny Valentine, Someday My Prince Will Come등의 익숙한 곡들과 찰리 파커의 Scraple From The Apple, MJQ의 Two Degrees East Three Degrees West, 그리고 키스 자렛의 Up For It같은 새로운 곡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선곡들은 같은 형식으로 연주하면서도 어떻게 이 트리오의 음악들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가와 연주 목록의 확장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 익숙한 멜로디의 My Funny Valentine이나 Autumn Leaves같은 연주들은 이미 이전 앨범을 통해 들려주었던 연주들이 호연중의 호연이였기에 그 이상은 없다라고 생각을 해왔던 필자에겐 아직도 최상의 새로움을 뽑아낼 수 있구나라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싱싱하게 꿈틀대는 연주였다. 마치 우리가 하나의 노래를 종일 반복해서 부르다보면 저절로 그 습관적 반복을 깨고 새로운 멜로디가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오히려 반복할수록 더 좋은 연주가 나온다고 생각이 될 정도인데 그것은 키스 자렛이 왼손과 오른손 모두 상호 독립적이면서 서로를 리드하는 피아니즘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오른손이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멜로디에 따라 음악적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각 곡들이 자렛의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멜로디를 부여받으면서 새롭게 되살아나는 것이다. 즉, 구조적으로 새로움을 찾아내는 것보다 같은 구조안에서 새로운 멜로디를 뽑아 내는 연주이기 때문-사실 즉흥 연주의 또 다른 이름이 즉흥 작곡이 아닌가?-이라고 보게 되는데 이것은 반복적으로 연주하면서 자신을 잃어 버리는 습관적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명료한 정신으로 자신의 연주에 집중할 때 가능한 경우다. 결과로서의 연주와 연주자가 하나가 되는 자기 무화의 순간은 그 다음 단계가 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멜로딕한 즉흥의 강조는 다른 앨범들보다 노래하는 듯한 스윙감이라는 이 앨범의 가장 큰 미덕과 연결된다. 모든 곡들이 비교적 빠른 템포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감상자를 치열한 열광의 세계로 인도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모든 곡에서 자렛의 피아노는 곡의 구조적인 부분은 게리 피콕과 잭 드조넷에게 맡긴채 그 특유의 중얼거림을 그대로 오른손에 쏟아붙는다. 앨범 타이틀 곡인 Up For It의 경우를 예로 들면 이곡은 Autumn Leaves와 연계되면서 일종의 연장(Extention)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전 곡에서 출발해 새로운 도약, 상승으로 급격하게 진행하기 보다는 흥겨운 분위기의 수평적 이동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스탠다드 곡들을 연주하고 있기에 당연히 2000년도의 Whisper Not(ECM)과 이 앨범을 비교하는 감상자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이번 앨범이 보다 더 키스 자렛 트리오의 전형에 가까운 연주를 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Whisper Not의 경우 당시의 건강 상태를 이유로 텍스트 자체를 중시하는, 그래서 과도한 연장식의 솔로 연주를 자제하는 비교적 차분한 키스 자렛 트리오의 연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연주는 1995년의 At The Blue Note(ECM)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싱싱하고 건강한 키스 자렛 트리오를 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1983년 Keith Jarrett이 트리오를 결성한 이래로 2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우리는 이 트리오가 20년이나 지속되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재즈 역사상 고정 트리오로서 20년이 넘도록 지속적이고 활발하게 활동을 한 트리오는 드물다. 순간을 중시하는 그래서 그때 그때 음악을 중심으로 다양한 멤버이동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꾀하는 재즈 무대에서 이토록 오랜시간 동안 서로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결코 매너리즘에 함락당하지 않고 매번 최상의 경지에 도달한 신선한 연주를 들려주는 것은 이 세 사람의 대가가 아니면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나의 설정된 방향에 수록곡들이 종속되는 경향을 보이는, 그래서 변화 자체가 기획될 수 있는 현대 재즈의 방법론을 따르지 않고 – 물론 지난 두 앨범은 기본적 방향이 설정되었던 것이 사실이다.-특정 순간 연주자들의 흔적을 기록하는, 그래서 각 곡들의 개별적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는 전통적 제작 방식을 따르면서 말이다. 한편으로는 이들처럼 매번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경우도 드물고 또한 대중적 인기를 견지하면서도 결코 자신들의 음악적 스타일을 주체적으로 고수하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았다. 올해 음악의 노벨상격인 로얄 스웨디쉬 아카데미가 수여하는 Polar 음악상이 최초로 ‘Popular’와 ‘Serious’부분을 통합하여 키스 자렛에게 수여되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키스 자렛의 이번 수상과 트리오의 결성 20주면을 기념하기 위한 많은 공연과 행사가 기획되어 있다고 하는데 올해가 그의 음악, 트리오 활동의 결산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 앞으로도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연주가 계속 되기를 바란다. 이미 필자는 새로운 키스 자렛의 앨범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이번 앨범에 부족함이 있어서가 아니고 또 다시 새로운 연주를 기다리게 되는 조급함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