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매되는 한국 재즈 연주자들의 앨범을 들어보면 정형화된 양식 자체에 얽메이지 않는다는 것, 그와 함께 과거나 전통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보다 자유로이 현재와 호흡한다는 것, 그래서 개성이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 등이 장점으로 드러난다. 게다가 몇몇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폭넓은 청취자를 대상으로 앨범을 기획했다는 느낌을 준다.
소문도 없이 갑자기 등장한 비안의 음악도 그렇다. 비안은 피아노 연주자 김성배의 예명인 동시 그가 이끄는 퀄텟의 이름이다.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다가 음악에 뜻을 품고 1998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클리 음대에서 수학했다 한다. 뒤늦게 음악으로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최근 한국 연주자들이 걷는 길과 유사한 음악적 길을 걸었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김성배의 음악은 또 다른 개성을 지녔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모습보다 작곡가, 편곡가로서의 자신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실제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버클리 음대를 졸업하면서 자작곡으로 채워진 공연을 했으며 지난 2004년에는 대전시립교향악단과 “The Piece Of Peace”라는 자작곡을 협연하기도 했을 정도로 작곡가로서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번 앨범도 역시 전곡을 작, 편곡했다. 물론 요즈음 등장하는 다른 한국 재즈 연주자들도 자작곡을 연주한다. 그러나 이 김성배라는 피아노 연주자에게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보다 더 크게 보게 되는 것은 그의 음악이 단순히 멜로디를 생각하고 이를 기반으로 탄탄한 연주 구조를 만들어 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넘어 보다 창의적인 극적 구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인 변화 속에서도 하나의 설정된 사색적 분위기가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비안이 음악 이전에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이런 이유로 앨범 수록곡들은 연주 자체보다 그 연주가 이끄는 음악적 이미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비안의 다른 세 멤버-히로야 추카모토(기타), 모토히토 후쿠시마(베이스) 프랑코 피나(드럼)-아 게스트로 참여한 두 명의 보컬 마르타 코메스와 모니카 잉베손, 그리고 트럼펫 연주자 댄 브랜티건도 곡 안에서 물결치듯 변하는 정서에 섬세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음악은 전체 사운드, 그로 인해 파생된 음악 이미지가 연주자들의 연주에 우선한다.
한편 그룹이 한국, 일본, 아르헨티나 출신의 연주자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인지 이들의 음악은 한국이나 미국, 그리고 유럽이라는 지형 어느 곳을 지향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을 지향한다. 그래서 음악에는 미국 포스트 밥의 창의성과 퓨전 재즈의 대중성, 유럽 중심 재즈의 시적인 부드러움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어느 정해진 성분비를 지닌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감성에 따라 다양한 조합으로 드러난다.
안타깝게도 연주자의 운명이 단지 그의 실력만으로 성패가 결정되지 않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창의적 감수성으로 무장된 피아노 연주자의 음악이 분명 한국 재즈 안에서 새로운 지형도를 만들어 낼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