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자렛의 새로운 앨범 소식은 언제나 많은 감상자들을 설레게 한다. 이것은 이제 그의 트리오 연주 앨범 이 일년에 한 장 꼴로 어느새 정례화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이러한 설렘은 언제나 그의 음악이 익숙한 느낌 속에서 새로운 무엇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분명 그의 피아니즘은 많은 동시대의 피아노 연주자들이 답습할 정도로 일반화되었고 또 그만큼 예측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아노 연주들은 결코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또 다른 그의 연주를 기다리게 만들 뿐이다. 갈수록 강렬한 느낌을 원하게 되는 마약처럼 말이다. 이러한 중독성 강한 그의 피아니즘은 단순히 그의 기술적인 면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음과 음들의 즉흥적인 조합들이 만들어 내는 싱싱한 상상적 힘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자렛의 연주가 급진적인 방향으로 흘러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연주에 공감하고 황홀해 한다. 분명 그는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상상보다 더 큰 재즈사의 획을 긋고 있는 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긴 10여 초의 침묵으로 더 큰 기대감 속에 시작되는 이번 <The Out-Of-Towners> 역시 익숙함 속에 담긴 자연스러운 신선함으로 감상자를 황홀하게 만든다. 사실 이번 앨범은 병상에서 일어나 새로운 활동을 시작한 이후 매번 새로운 파격적 시도로 가득 찼던 근작 앨범들에 비해 확연하게 새로운 무엇을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최근에 발표한 몇 장의 앨범을 뛰어 넘어 가장 활발한 활동으로 극한의 상상력으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자유로이 뽑아 내었던 80년대 키스 자렛 트리오의 연주로 다시 돌아갔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눈에 보일 정도로 키스 자렛만의 복고적 향취를 띠고 있다고 할까? 아무튼 한 마디로 이번 앨범을 정의한다면 키스 자렛 스탠더드 트리오라는 초기 의미에 충실한 앨범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실제 이번 앨범은 여러 모로 <Still Live>(ECM 1988)을 많이 연상시킨다. <Still Live>앨범은 치열한 상호 연주와 솔로 속에서도 멜로디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으며, 강력한 역동성 속에서도 시적인 부드러움을 표현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키스 자렛 트리오의 최고 명작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Still Live>처럼 독일 뮌헨에서 라이브로 녹음된 이번 <The-Out-Of-Towners>는 더블 앨범이었던 <Still Live>의 구성을 축약해 놓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상당부분 유사한 구성적 측면을 보인다. 예로 키스 자렛의 자유로운 인트로 연주로 시작해 익숙한 테마로 이어지는 “I Can’t Believe That You’re In Love With Me”의 진행 형식은 <Still Live>의 “My Funny Valentine>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이후에 진행되는 곡들도 솔로들의 정서적 진행이나 응집력 강한 상호 연주 등에서 각각 <Still Live>의 곡들과 상통하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이번 앨범이 그저 그런 자기 복제적 성격을 띠는 연주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오히려 모처럼 폭넓은 대중을 감동시킬 연주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키스 자렛과 그 트리오의 음악 애호가들은 스탠더드 트리오로서의 모습에 더 매료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번 앨범에 담긴 80년대 향취가 다름 아닌 <Still Live>를 향하고 있다는 점은 오히려 그동안 이 앨범의 감동을 새로운 형태로 다시 느끼기를 원했던 감상자들에겐 큰 기쁨을 주리라 생각한다. 그러니 과연 누가 자기 복제라는 표현으로 부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그보다는 모처럼 원류로 돌아간 키스 자렛 트리오라는 평가를 내리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Still Live>와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번 앨범에 아예 처음 만나는 새로운 감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참신한 레퍼토리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그의 스탠더드 트리오 앨범들은 상당 부분 레퍼토리가 (늘 새로운 해석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우려를 갖게 했었다. 하지만 이번 앨범의 수록 곡들은 그동안 앨범으로 만날 수 없었던 곡들이다. 그리고 솔로의 전개에 있어서도 색다른 희열을 주는 순간이 존재한다. 특히 “I Love You”에서 오로지 심벌의 섬세한 강약으로 솔로 연주를 펼쳐나가는 잭 드조넷의 연주는 앨범을 감상하면서 얻게 되는 중요한 기쁨 중 하나이다.
한편 이번 앨범의 감동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사운드 자체에도 있음을 언급해야겠다. 사실 최근에 녹음된 키스 자렛 트리오의 앨범들은 너무나도 개별 악기 사운드에 집중되어 있어서 사운드 전체를 감싸는 공간적인 면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앨범은 개별 악기의 세밀한 부분을 잘 살리면서 전체 사운드를 부드럽고 동그란 공간 속에 안정적으로 위치시키고 있다. 그래서 키스 자렛 트리오의 연주의 진면모가 투명하게 드러난다. 아마 최근 키스 자렛 트리오의 라이브 앨범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마틴 피어슨의 ECM에서의 가장 뛰어난 녹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분명 키스 자렛 트리오는 앞으로도 새로운 앨범을 발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앨범들은 매번 새로운 감동을 줄 것이다. 그러나 한동안 이번 앨범 같은 감동을 주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키스 자렛 트리오의 유효기간이 만료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번 앨범이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다음 앨범이 그 이상의 만족을 더 준다면 필자는 다시 간사하게 말을 바꿀 수밖에 없겠지만 이 앨범에 대해 필자가 받은 감동을 전달하기엔 이러한 표현도 부족하다. 아! 그리고 키스 자렛의 다음 앨범은 다행히 트리오가 아닌 모처럼만의 솔로 앨범이 될 것이라 한다
키스 자렛의 팬으로 많은 음반들을 갖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손이 자주 가는 앨범들이 있는데 이 음반도 그렇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자렛의 음악은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그 안에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프레이징이 들을때마다 나타나는 것이 신비로울 뿐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움직여지는 음악인거 같아서..지루할 틈이 별로 없는거 같아요.ㅎ 이젠 뭐랄까 큰 국립공원같은 거대한 숲을 이룬 음악가가 아닐까..
시간을 거슬러 still live와 연결하신 사려깊은 시선에 오늘도 즐겁고 새로운 시각을 얻어갑니다.
후기 트리오 앨범 중에는 이 앨범이 제일이지 않나 싶네요. 이미 이 또한 1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말이죠.
거대한 숲이란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