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필자는 8년 전 그녀의 <All For You> (Verve 1996) 앨범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때 시큰둥한 시선을 보냈었다. 그것은 당시 필자가 아방가르드라는 무한의 세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었지만 피아노 옆에 앉아서 “당신께 모든 것을 드리겠어요”(All For You)라는 식의 부드러운 시선을 담고 있는 앨범 표지가 이상한 선입견을 만들어 냈었기 때문이었다. 즉, 노래보다는 얼굴로 승부하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 마흔이 넘은 그녀의 얼굴은 지금 보아도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이것이 그릇된 편견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 그 고혹적인 시선을 옆으로 돌렸던 <When I Look In Your Eyes>(Verve 1999) 앨범의 수록 곡 중 한 곡을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어느 여름 날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무더운 낮이 막 끝나고 밤이 시작되던 무렵에 되는대로 선택을 했던 어느 라디오 채널에서 보내주었던 “Devil May Care”는 처음이 아니라 중간부터 들었던 것이었지만 달콤함과 쓴 맛을 동시에 담고 있는 그 스모키 보이스는 필자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당시까지 필자는 다이아나 크롤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노래의 주인 공을 알게 되기까지 다시 얼마의 보내야 했다. 그런 나중에 그 가수가 다름아닌 다이아나 크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보다 더 컸던 것은 그녀의 노래와 음악들이 필자의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재즈의 새로운 흐름에 민감했던 필자였지만 다이아나 크롤에 대해서는 눈먼 장님이었던 것이다. 행복은 주변에 있다는 흔한 경구처럼 순간에 생겼던 막연한 선입관이 좋은 음악을 한동안 모르고 살게 만들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다이아나 크롤은 명실상부한 재즈의 슈퍼 스타다. 그녀의 노래와 음악들은 이것저것 따지기 좋아하는 여러 평론가들에게나 쉬운 접근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일반 대중들에게나 모두 큰 지지를 얻고 있다. 그녀가 <When I Look In Your Eyes>로 그래미 베스트 재즈 보컬 부분에서 수상을 하고 또한 빌보드 재즈 차트에 52주 연속 1위를 했다는 것이 그녀가 대중성과 음악성을 겸비하고 있음을 말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그리고 이밖에도 그녀의 앨범들을 차근차근 들어보면 그녀의 정말 앨범들이 세인들의 관심을 받을 만 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녀가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녀의 보컬 때문일 것이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그녀의 보컬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줄리 런던, 크리스 코너 등의 백인 블론디 보컬들에 편재했었던 비단 같은 부드러움 솜사탕 같은 달콤함과 함께 사라 본 등의 재즈 보컬의 3대 디바에 고유했던 흑인 특유의 깊은 울림을 그녀의 목소리는 함께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상이한 요소들은 곡에 따라 넣거나 뺄 수 있는 차원에서 그녀의 목소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를 이루는 기본으로서 매 곡마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한없이 말랑말랑한 느낌으로 육감적 분위기를 발산하는 보컬 곡에서도 결코 그녀의 보컬은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그녀의 노래들은 그저 달착지근한 멋이나 기교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
예쁘게 노래하는 것만큼이나 그녀는 정서적 표현에 관심을 보인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편안하고 넉넉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표면적 경박함에 흐르지 않고 흔히 말하는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것은 모든 노래에 그녀 스스로가 정서적으로 몰입했고 이것이 다시 제대로 감상자에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다이아나 크롤은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세 번째 앨범 <All For You>(Impulse 1996)이 뛰어난 보컬이자 피아노 연주자였던 냇 킹 콜에 대한 헌정을 담고 있었던 것은 그녀가 보컬만큼 피아노 연주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녀가 다른 블론디 보컬들과 차별화되는 것도 이러한 출중한 피아노 실력 때문이다. 실제 그녀의 음악 수업은 피아노가 먼저였으며 재즈에 대한 관심 역시 피아노를 통해서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대단한 재즈 광인데 그 중 스윙 이전의 스트라이드 피아노 스타일에 많은 애착을 지녔던 듯하다. 그녀가 제일 처음 관심을 가졌던 재즈 피아노 연주자가 팻츠 왈러나, 제임스 P 존슨, 얼 하인즈 같은 초기의 피아노 연주자였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물론 이러한 초기 피아노의 스타일이 그녀의 피아노 연주에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이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낭만적 노래를 불러주는, 흔히 말하는 칵테일 피아노 연주자의 이미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삶의 흥겨움을 중심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던 이들 초기 피아노 연주자들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직접 칵테일 피아노 연주자로 레스토랑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고 한다. 그녀의 노래와 피아노가 음악적 깊이를 지니고 있으면서 대중적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은 매 앨범마다 단순히 그녀의 보컬만큼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모습도 동등하게 부각되게 만들었다.
사실 그녀의 경력을 살펴보면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고 지속적인 성공의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일지기 드럼의 제프 해밀턴과 베이스 연주자 레이 브라운의 눈에 들어 1992년 레이 브라운의 후원 아래 제프 해밀턴과 베이스 연주자 존 클레이튼과 첫 앨범 <Steppin’ Out>(Justin Time)을 녹음한 이후 그녀의 음악 인생은 중단 없는 전진만이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그녀가 순탄한 성공의 길을 걸으며 여느 팝 스타 이상의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음악이 아닌 출중한 외모에서 찾으려 하기도 한다. 8년 전 필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역시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이자 개성있는 보컬로 현재 그 독창적 스타일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있는 파트리시아 바버는 다이아나 크롤이 그녀가 보았던 다른 어느 연주자들보다 지독한 연습 벌레였음을 증언한다. 서로 그 스타일이 확연하게 다르지만 두 연주자는 아주 절친한 친구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는데 그녀의 믿을 수 없는 연습량을 안다면 그녀의 성공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이아나 크롤의 음악이 보다 더 대중적인 기호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것이 경박한 상업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진지한 스타일의 연구와 노력이 밑받침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발언이다. 실제 첫 앨범 이후에 다이아나 크롤이 발표한 앨범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자기 복제가 아닌 그 이상의 고민을 수반한 변화를 꾸준히 시도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2004년에 발매된 다이아나 크롤의 <The Girl In The Other Room>은 그 동안 보여준 그녀의 양적인 다양성들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질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질적인 변화는 보컬이자 피아노 연주자인 다이아나 크롤의 모습이 뮤지션의 모습으로 종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선 그동안 앨범 표지가 그녀의 매력적인 외모에 집중되었던 것과 달리 (드디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것에서 그 변화를 추측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은 실제 앨범을 감상해 보면 확연한 사실로 드러난다.
무엇보다 이 앨범은 그 수록 곡들이 스탠더드 곡들로만 채워졌었던 기존 앨범들에 비해 상당한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모스 앨리슨의 블루스 곡 “Stop This World”를 시작으로 탐 웨이츠의 “Temptation”, 조니 미첼의 “Black Crow”,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남편이 된 엘비스 코스텔로의 “Almost Blue”등 앨범에서 그녀가 노래하고 있는 곡들은 전통적인 재즈와 거리가 있는 곡들이다. 게다가 앨범의 절반인 6곡은 다이아나 크롤 본인이 직접 작곡한 곡들이다. 이것은 그녀가 이제 노래와 피아노 연주뿐만 아니라 전체 사운드를 스스로 조절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 그 동안 모든 앨범들은 유명 프로듀서 토미 리푸마에게 일임했었는데 이번 앨범은 그녀가 공동 제작자로 이름을 함께 올리고 있다. 아마도 변하지 않는 대중적인 매력은 토미 리푸마의 여전한 손길이고 밖의 음악적 변화는 다이아나 크롤의 손길이 아닐까 추측된다.
아무튼 이러한 수록 곡들의 다양성은 앨범의 사운드에도 영향을 끼쳐 신선한 변화를 수반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기타의 역할이 더 많이 증폭되었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무래도 다이아나 크롤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때문에 이전까지 기타의 역할은 보조자의 위치를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앨범에서 앤서니 윌슨이 담당하고 있는 기타는 앨범에 블루스의 끈끈함과 포크의 건조함을 가미하는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다. 이것은 앨범 타이틀 곡에서 제대로 감지할 수 있다.
다이아나 크롤의 보컬 역시 미세한 변화가 감지된다. 여전히 그녀의 스모키 보이스는 그대로 이지만 이전의 촉촉한 느낌은 다소 건조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존 웨이츠의 “Temptation”의 매력적인 해석이나 조니 미첼의 “Black Crow”에서 느껴지는 까칠한 보컬에 주목해 보기 바란다. 원곡의 특성을 나름대로 반영을 했기 때문이라 하겠지만 그녀의 까칠하고 건조한 보컬은 갈증의 정서를 유발한다. 한편 그녀가 직접 작곡한 곡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그녀의 몰입된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그 중 앨범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Departure Boy”에 드러난 깊은 상실과 애상의 정서는 이 앨범뿐만 아니라 그녀의 모든 앨범들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앨범에서 드러나고 있는 다이아나 크롤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에 대한 그녀만의 해석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 있지 않은가? 노라 존스의 기이한 성공 이후 초래된 미국 재즈 계의 변화 말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이 앨범에 담긴 다이아나 크롤의 모습이 기존과 확연히 다르다거나 재즈적인 면이 희박하게 드러난다고 예단하지 말자. 이전보다 훨씬 더 생기 넘치는 젊은 재즈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 다를 분 앨범에 담긴 음악들은 분명 재즈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분명 이 앨범은 그동안 꾸준하게 다이아나 크롤의 음악을 감상해왔던 애호가들에게 충격적으로 비추어지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스타일의 변화 속에서도 다이아나 크롤의 기본적인 대중적 매력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새로움과 익숙함이 잘 공존한다고 할까? 그러므로 첫 감상의 충격은 The Girl In The Other Room이라는 앨범 타이틀처럼 이내 다른 곳에 감추어져 있었던 다이아나 크롤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는 만족으로 변할 것이라 확신한다. 필자는 그녀의 여러 앨범들 중 이번 앨범이 가장 그녀의 음악적 확신과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녀는 단순히 노래 잘하는 보컬도 아니요 감각적인 프레이징을 펼치는 피아노 연주자도 아닌 전체 사운드를 조망하고 그 속에서 자신과 다른 연주자들의 관계를 설정할 줄 아는 뮤지션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일 매력있다고 생각하는 보컬입니다. 다이애나 크롤 목소리는 무엇보다 중성적이고 허스키한게 매력인데, 감미로운 멜로디를 부를때 보면.. 다른 여성스런 보컬에 비해 오히려 더 감미롭게 들리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