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히로미의 앨범 <Brain>(Telarc 2004)를 들었을 때 필자는 여성답지 않은 강력한 에너지와 다양한 변화를 거듭하는 아기자기한 구성, 일렉트로닉과 어쿠스틱을 오가는 폭넓은 감수성에 감탄했었다. 실제 이러한 감동을 미국의 재즈 제작자들도 느꼈는지 현재 히로미는 미국 내에서도 주목 받는 젊은 피아노 연주자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되는 <Spiral>은 이러한 히로미의 이미지를 한층 더 강화시킬 것 같다. 게다가 화려한 기교 중심으로 흐르는 듯한 그녀의 피아니즘이 클래시컬한 느낌마저 드는 내면적인 침묵의 영역까지 아우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한층 더 그녀의 음악에 관심을 갖게 한다. 이전 앨범 <Brain>이 현란한 키보드 연주로 시작해 시종일관 현란한 기교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던 것을 기억하는 감상자라면 너무나도 조용하고 차분하게 시작하는 이번 앨범의 첫 곡이자 타이틀 곡 “Spiral”을 듣고 새삼 앨범의 주인을 확인할 지도 모른다. 유럽의 피아노 연주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다소 암묵적인 정서를 지닌 앨범의 도입부는 분명 이전 히로미의 연주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앨범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선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어찌보면 <Brain>의 음악적 구조를 뒤집어 놓았다고나 할까? 침묵으로 시작된 사운드는 갈수록 화려하고 현란해 지면서 피아노 대신 키보드를 연주하는 보너스 트랙 “Return Of Kung-Fu World Champion”으로 끝난다. 어쩔 수 없는 히로미의 화려한 자기 표현 욕구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까지 그녀가 들려주는 새로운 사운드는 상당한 만족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그녀는 연주자 운도 좋은 것 같다. 지난 앨범에 이어 토니 그레이-그는 마치 기타를 연주하듯 베이스를 연주한다-와 마틴 발리오라가 그녀와 함께 하고 있는데 이들은 개인적인 실력 외에 히로미를 조력하는 데 아주 뛰어난 면모를 보여준다.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트리오만의 무엇이 생겼다는 생각이다. 정말 이들이 아니었으면 이런 사운드가 가능했을까 싶다. 한편 이 앨범의 한정판에는 지난 2004년 일본에서 가진 공연의 맛보기 영상이 하나 추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