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역사를 빛낸 피아노 연주자는 참 많다. 팻츠 왈러 아트 테이텀, 버드 파웰을 거쳐 빌 에반스, 허비 행콕, 칙 코리아, 키스 자렛 등 많은 연주자들이 탁월한 기량과 개성 넘치는 음악으로 재즈 피아노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많은 재즈 피아노 연주자들은 역사적 측면에서는 상기한 인물들을 언급하면서도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빌 에반스와 키스 자렛을 제일 많이 언급하곤 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 두 연주자가 기교와 함께 연주의 정서적 측면을 발전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한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피아노 트리오를 두고 이야기한다면 어떤 트리오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스콧 라파로(베이스), 폴 모시앙(드럼)이 함께 했던 시기의 빌 에반스 트리오와 게리 피콕(베이스), 잭 드조넷(드럼) 과 함께 하고 있는 키스 자렛 트리오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리고 현재의 시점에서 본다면 키스 자렛 트리오가 트리오로서는 가장 모범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많은 영향을 주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트리오가 1983년 결성된 이래 25년간 일체의 흔들림 없이 그 편성을 유지하면서 현재까지도 최상의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키스 자렛 트리오가 1983년에 결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즉, 1983년 당시 키스 자렛과 나머지 두 멤버는 트리오를 결성하겠다느니, 결성해서 오랜 시간 함께 연주를 하겠다느니 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만약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이 트리오는 1983년이 아니라 1977년에 결성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77년 게리 피콕의 이름으로 <Tales Of Another>(ECM 1977)라는 앨범을 녹음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983년 1월 뉴욕의 파워 스테이션 스튜디오에 세 연주자가 모였을 때 이들과 제작자 맨프레드 아이허는 스탠더드 곡을 연주한 앨범 한 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앨범을 녹음할 것이라는 기대 또한 갖고 있지 않았다. (여기에는 앨범 단위로 계약을 하곤 했던 ECM의 제작 방식도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그렇게 모인 연주자들은 현장에서 스탠더드 악보집에서 키스 자렛이 선택한 곡들을 특별한 준비 없이 연주했다. 그런데 연주를 하면서 세 연주자는 다른 어느 때보다 호흡이 서로 잘 맞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앨범 제작과 상관없이 서로의 연주를 즐기며 여러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뛰어난 호흡에 자극 받아 보다 자유로운 즉흥 곡까지 연주하게 되었다. 정말 순간의 감흥이 만들어 낸, 어쩌면 세 연주자들조차 예상할 수 없었던 신비한 녹음이었다.
그렇게 마친 녹음을 다시 들으며 맨프레드 아이허는 고민을 해야 했다. 한 장의 앨범으로 정리하기에는 트리오의 연주가 너무나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맨프레드 아이허는 이 녹음을 한 장이 아닌 석 장의 앨범으로 정리해 발매했다. 그것이 바로 <Standards vol. 1>, <Standards vol. 2>, 그리고 <Changes>였다.
시적인 멜로디와 창조적인 화성, 서사적인 분위기를 띄는 솔로 연주, 민주적인 인터플레이로 가득한 이들 앨범에 대한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상당했다. 특히 스탠더드곡집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평단과 대중은 이들의 연주에서 70년대 퓨전 재즈로 인해 뒤로 밀려났던 재즈의 전통이 새로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의 흐름을 퓨전 재즈로 바꾸어 놓은 이후 재즈는 전자 악기가 전면에 부각되었으며 이로 인해 어쿠스틱 사운드와 비밥에 기초한 전통적인 방식의 연주는 다소 낡고 고루한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평소 장시간 자유로이 연주하는 즉흥 솔로 피아노 콘서트와 진보적 성향의 퀄텟 연주, 그리고 클래식과 재즈가 섞인 다양한 작업을 해오며 재즈의 지평을 확장시켜 온 키스 자렛이 전통적인 어법으로 트리오 연주를 펼친 것이다. 그렇다고 키스 자렛 트리오의 연주가 윈튼 마샬리스를 중심으로 한 신 전통주의자들처럼 마냥 과거로만 향했던 것은 아니다. 전통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세 연주자의 연주는 전통의 재현이 아니라 독자적인 방식의 계승, 발전의 측면이 강했다. 훗날 키스 자렛이 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트리오가 “프리 재즈를 연주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던 것도 이처럼 피아노 트리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롭고 신선한 방향으로 연주를 진행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많은 연주자들이 키스 자렛 트리오를 트리오 연주의 모범으로 삼고 닮기 위해 노력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이렇게 첫 녹음이 기대 이상의 호평을 받으면서 키스 자렛 트리오는 활동 기간을 늘려나갔다. 그러면서 탁월한 기교와 감성 그리고 집단 연주가 긴장을 잃지 않고 멋지게 조화를 이룬 연주를 공연과 앨범을 통해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그러면서 키스 자렛 트리오는 현존 최고의 피아노 트리오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2008년. 한 장의 앨범만을 위해 모였던 키스 자렛 트리오가 활동을 계속 한지 어느덧 25년이 흘렀다. 늘 새로운 방향으로 연주를 발전시키는 연주자들이 이렇게 불협화음 없이 꾸준한 활동을 보였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그렇기에 ECM 레이블은 유례 없이 이들의 첫 녹음을 하나로 묶어 <Setting Standards>라는 타이틀의 세트 앨범으로 재발매 했다. 1983년 키스 자렛 트리오가 만들어 낸 재즈 피아노 트리오사의 전환적 순간을 미처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꼭 감상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