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많은 재즈 피아노 연주자들은 보통 버드 파웰이나, 아트 테이텀 같은 전설적 연주자들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에게 영향을 준 연주자로서는 빌 에반스를 언급한다. 그것은 빌 에반스에 들어서면서 재즈 피아노가 리듬이 아닌 개인의 심상을 표현하는 차원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한편 빌 에반스 이후 같은 연장 선상에 놓인다 할 수 있는 키스 자렛 또한 많은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자렛의 경우는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보다 더 직접적으로 신인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그의 피아니즘은 하나의 모범으로 작용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스위스의 피아노 연주자 티에리 랑 역시 빌 에반스와 키스 자렛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음악을 들려주는 연주자이다. 실제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클래시컬한 감성을 바탕으로 한 투명하고 서정적인 피아니즘은 빌 에반스를, 그리고 트리오 등의 그룹을 운용하는 방식에서는 키스 자렛을 많이 연상시킨다. 하지만 티에리 랑이 단지 선배들의 장점을 그대로 답습하는 연주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음악적 토대를 이루는 부분은 분명 이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이룩해 놓은 성과가 자리잡고 있지만 이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영롱한 솔로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피아니즘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명도는 그렇게 크지 않다. 이것은 스위스가 유럽의 재즈 무대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작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하지만 블루 노트 레이블에 입성한 이후에도 그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증폭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실제 국내에서도 그의 지명도를 살펴본다면 소수의 마니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명에 가깝다. 키스 자렛이나 빌 에반스 정도의 인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음악성에 어느 정도는 걸맞은 대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이러한 인식 부족은 레이블의 홍보력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뒤늦게나마 블루 노트는 이러한 점을 인식한 모양이다. 3장의 앨범을 하나의 시리즈로 기획하여 제작을 했으니 말이다. 나는 처음에 티에리 랑의 앨범이 <Reflections>라는 이름의 시리즈로 3장이 발매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존에 그가 녹음했었던 것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정리하여 발매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2003년 스위스의 라디오 로망드 스튜디오에서 며칠에 걸쳐 녹음한 자작곡 25곡이 3장의 앨범으로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마치 키스 자렛 트리오가 그들의 첫 녹음을 그대로 3장의 앨범으로 나누어 발표했었던 것을 연상시키는데 하지만 티에리 랑의 경우 3장의 앨범이 단순히 트리오 연주로 일관하지 않고 첫 번째 앨범에는 트리오 연주를 담고 다른 두 장에는 각기 다른 편성의 퀸텟 연주를 담았다는 것이 다르다.
그 중 먼저 소개되는 첫 번째 앨범은 트리오 연주를 담고 있다. 활발한 리듬을 기반으로 조밀하게 펼쳐나가는 랑의 솔로부터 조용하고 개인적인 솔로 연주까지 그의 피아니즘이 지닌 모든 매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와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베이스의 하이리 쾬지그, 드럼의 피터 슈미들린과 함께 펼치는 탄탄한 인터 플레이 역시 여러 유러피안 피아노 트리오 가운데서 티에리 랑 트리오를 따로 생각하게 만든다. 한편 우리가 티에리 랑의 연주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보다 모든 연주에 내재된 맑고 깨끗한 내면적 시성이 아닐까 생각된다. 너무 달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흐르는 그의 아름답고 촉촉한 멜로디들은 기교도 기교지만 감상자를 현실이 다른 어느 곳을 꿈꾸게 만든다.
이번 시리즈 앨범 타이틀은 <회상>인 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랑의 음악을 새로이 정리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의 음악들은 정리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출발을 기획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블루 노트가 이번에 3장을 한꺼번에 발매하려 한 것도 랑의 새로운 의욕을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남은 것은 감상자들이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