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키스 자렛의 새로운 앨범을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2001년 병상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활동을 시작한 이후 거의 매년 한 장씩 꼬박꼬박 앨범을 발표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스 자렛의 음악이 지닌 신비감이 다소 떨어졌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앨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익숙한 듯한 연주에서도 언제나 그만의 마법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이 발매된 <Radiance>는 새로운 차원에서 큰 관심을 끈다. 그것은 무엇보다 앨범이 그의 솔로 콘서트를 담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실 최근 자렛이 활발한 앨범 활동을 보이고 있다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느껴졌던 것은 트리오 연주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의 트리오가 새로운 연주를 펼친다고 하더라도 편성 자체가 주는 변화, 솔로 연주만의 감동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많은 애호가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렛이 솔로 앨범을 발표하지 못한 것에는 여전히 건강상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키스 자렛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솔로 콘서트가 가능했던 것은 열정과 무모함이 에너지로 자리잡고 있었던 젊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곤 했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서 그의 솔로 활동은 갈수록 힘들어졌고 나아가 “만성 피로 증후군”이라는 병은 그를 모든 연주를 중지하고 쉬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복귀 후에도 그는 솔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렛은 솔로 활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녀왔다. 그래서 1999년에는 일본에서 두 번의 솔로 콘서트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연주는 자렛 본인에게는 실망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래서 자렛은 보다 안정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트리오의 형식을 빌어 솔로 콘서트 연주의 변형된 연주를 시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Inside Out>(ECM 2001), <Always Let Me Go>(ECM 2002)였다.
2002년 10월 일본 오사카와 도쿄에서 3일의 차이를 두고 가졌던 두 콘서트를 기록하고 있는 이번 <Radiance>는 우선적으로 1995년 이태리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가졌던 공연을 담은 앨범 <La Scala>(ECM 1997) 이후 8년만의 공연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솔로 콘서트 앨범을 기다렸던 애호가들에게 큰 만족을 줄만하다. 하지만 이 앨범에 담긴 솔로 콘서트는 다양한 음악 양식을 즉흥적 감흥에 의거하여 연결하고 분리해 나갔던 기존의 솔로 콘서트와 자못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공연에서 키스 자렛이 시도한 솔로 콘서트는 하나의 즉흥 곡을 연주하고 두 번째 곡은 그 첫 곡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이 연주를 발전시키며 세 번째 곡은 다시 두 번째 곡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진행하는 식의 구분되어 있지만 정서적으로 연결된 여러 개의 단편적 즉흥 연주를 펼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 단편들에 대해 후에 “Radiance”라는 표제를 붙였다. 그 결과 앨범에는 총 17개의 단편이 표제를 중심으로 모였다. 그런데 그 17개의 단편이란 것이 오사카 공연의 13편 전부와 도쿄 공연의 선택된 4편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의 도시를 주제로 공연이 정리되기를 바라는 감상자들에겐 다소 아쉬운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앨범에 담긴 곡들은 스튜디오 녹음 이상으로 하나의 일관된 사운드와 정서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기에 이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연주 방식은 분명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과거의 연주와 다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과거의 연주도 바로 직전 연주의 흐름을 이어 받아 새로운 방향으로 연주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변화의 순간에 휴지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키스 자렛은 이러한 연주 방식을 택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과연 쉬지 않고 한 시간 가량의 즉흥 솔로 연주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1999년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보다 안정적인 솔로 콘서트 방식이 그에겐 필요했었을 것이다.
아무튼 결과로서의 음악은 새로운 키스 자렛의 승리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바를 탐구하듯 다소 복잡한 연주로 시작을 한 공연은 갈수록 정돈되고 경건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렛은 무한으로의 상승에 대한 갈망부터 침묵으로 무화 되려는 욕구까지 폭이 큰 정서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 앨범의 매력은 처음보다 그 다음이 더 좋은, 그러니까 들을수록 그 느낌이 좋다는 것이다. 특히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았던 정제된 자렛의 멜로디가 피아노 앞에 앉은 자렛만큼 차분하게 집중을 했을 때 들리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상당한 쾌감이다.
키스 자렛은 “이전의 연주를 다음 연주가 따르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즉, 이전의 연주가 이룩한 성과를 답습하기 보다 다시 이를 넘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하고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번 앨범 <Radiance>는 바로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새로움을 최대한 뽑아 낼 수 있었던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새로움을 향한 탐구가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 그의 나이와 함께 갈수록 어려워 질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는 연주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 한 자신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즉흥 연주 방식으로 우리를 감동시킬 것이다. 벌써 새로운 그의 앨범을 기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