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2004년 프랑스 파리로 가서 스케치 레이블의 제작자 필립 기엘메티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스케치의 앨범 제작 수를 줄여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스케치는 그 후로 얼마 가지 않아 아예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그 후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음악적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레이블로 평가될 정도로 성공했고 수익의 측면에서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경영에 실패를 했기에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필립 기엘메티의 제작자로서의 인생은 스케치의 침몰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디자인이나 음악적 방향 모두에서 스케치를 이어받았음이 명백한 미니엄이라는 새로운 레이블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 미니엄은 프랑스의 디스코그라프라는 유통사에 소속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레이블의 전단계라고나 할까? 아무튼 미니엄이 건재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죠바니 미라바시의 새 앨범은 바로 미니엄 레이블의 첫 번째 제작 결과물이다. 스케치에서도 죠바니 미라바시의 트리오 앨범 <Architectures>(1998)이 레이블의 두 번째 앨범이었으니 필립 기엘메티와 죠바니 미라바시의 우정은 상당한 모양이다. 하긴 거의 무명에 가까운 연주자가 장기적 안목으로 연주자의 성장을 지켜보는 제작자를 만나 세계적 인정을 받고 그로 인해 제작자도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으니 서로의 각별한 마음이 깨지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리라.
죠바니 미라바시는 이탈리아인 특유의 아름다운 멜로디적인 감각과 그 안에 담긴 서정으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그의 <Avanti>(2001)앨범은 미라바시의 피아니즘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수작이었다. 비록 트리오나 퀄텟의 형태로 연주되고 있지만 이번 새 앨범에 담긴 음악들은 모두 기존 미라바시의 피아니즘을 다시 한번 아름답게 드러낸다. 여전히 그가 만들어 내는 멜로디에는 촉촉하고 잔잔한 서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고역대가 강조된 선명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이 매력으로 드러나는 피아노 음색도 여전하다.
하지만 만약 이번 앨범이 아무리 그의 피아니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지만 단순히 <Avanti!>의 트리오나 퀄텟 버전에 지나지 않았다면 필자는 이번 앨범에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미라바시는 이번 앨범이 트리오 앨범이자 퀄텟 앨범임을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즉, 멜로디스트로서의 능력을 드러내면서도 혼자서 하는 연주가 아님을 제대로 인식한 연주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듣게 되면 처음에는 미라바시의 피아노 연주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만 이후에는 세 명의 연주자-간혹 네 명의 연주자-들이 혼연일체로 하나가 되어 연주하는 것이 귀에 들어올 것이다. 실제 앨범에 담긴 트리오 연주의 경우 물론 피아노 외에 베이스나 드럼이 강조된 부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하나인 듯한 단순미가 상당히 강조되고 있음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앨범의 첫 곡 “Ero Io”같은 경우 연주의 상당 부분이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과 피아노, 베이스와 드럼이 하나가 된 연주를 진행하는 것으로 이루어 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화려한 솔로가 있어도 연주는 상당히 안정적이고 잘 제어된 구조를 지닌 것처럼 들린다. 미라바시가 프로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한 초기 시절부터 알아 온 트럼펫 연주자 플라비오 볼트로가 참여한 퀄텟 연주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감상자들이 이 앨범에서 색다른 정서를 느낀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편성임에도 멤버들이 이처럼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절제된 연주를 펼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 앨범은 미니엄의 첫 번째 앨범이다. 그리고 미라비시의 미니엄에서의 첫 번째 앨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앨범이 스케치에서의 첫 앨범처럼 트리오 중심의 앨범-퀄텟이지만-앨범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피아노 연주자에게 잇어 트리오 연주야 말로 가장 안정적이고 기본적인 편성이 아니던가? 즉, 미라바시도 새로운 출발을 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중적인 측면도 많이 고려했다고 생각된다. 특히 프랑스 외에 가장 큰 호응을 보이고 있는 일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앨범 수록곡 가운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 이 곡의 연주는 앨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연출한다.